예술 작품과 아카이브의 경계 사이: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우리의 기억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어 기술은 기억을 외재화하여 영구적으로 남길 수 있는 장치로서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보철적 존재이다. 이렇게 외재화된 기억은 구석기 시대 원시인들의 도구에서부터 시작하여 글쓰기, 그리고 이제는 디지털화하는 방식으로 기술의 발전과 함께 변화되어 왔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기억 흔적들을 밀랍판에 남기는 행위, 다시 말해 외재화하는 과정을 “아카이브화()”라고 불렀다. 아카이브화는 기록된 만큼 사건을 생산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아카이브화를 통해 원초적 기억을 상기하는 것 또한 새로운(또 다른) 아카이브화이기에 그 자체가 새로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정신 내부에 기억 흔적을 남기는 것과 정신 외부에서 실제 기록을 작성하는 것 모두 포함하는 아카이브화는 무형의 기억 흔적과 유형의 기록들을 동일 선상에 놓게 되며, 아키비스트가 과거를 통해 실재를 복원하거나 기억을 되살리겠다는 역사학적 목적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기록하는 행위를 목적성이 없는 새로운 아카이브화로 만들며, 데리다는 그가 해체한 아카이브의 역할로부터 아트 뮤지엄도 기록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즉, 이제 예술 또한 데리다가 해체한 아카이브의 개념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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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현재 진행 중인 디지털 영상 아카이브의 의미와 아키비스트로서의 아트 뮤지엄의 역할에 대해 고찰하는 아카이브 전시이다. 본 전시에서 관람할 수 있는 영상 아카이브들은 ‘소장품’으로 미술관에 들어왔던 ‘예술 작품’이자 아카이브의 자료가 되었다. 작품이자 아카이브의 자료가 된 영상들의 전환 목적은 관객과 연구자를 위한 교육적 목적과 역사적 목적이 있다. 두 번째 목적인 역사적 목적은 더 이상 과거의 ‘인과적 연쇄’의 개념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영상 아카이브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룬다. 고전적 문서고를 연상시키는 구조 속에 랜덤하게 놓인 영상 아카이브들은 고전적 아카이브와 동시대적 플랫폼,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이 교차하고 겹쳐져 보관된 문서들 사이에서 아우성을 낸다. 랜덤하게 놓여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각자의 소리를 내고 있다.

본 전시에 설치된 작품들은 전시실 앞에 이루어져 있는 단채널 영상 아카이브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단채널 영상 아카이브는 영상을 관람할 수 있는 컴퓨터에 프로그램화 되어 의자에 앉아서 관람할 수 있도록 비치되어 있다. 영상 아카이브 자료에는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에 전시된 작품과 다른 영상 작품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볼 수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와 전시에 설치되어 있는 영상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동일한 영상을 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앞에서 우리는 디지털화되어 있는 작품이기에 영상 작품이자 아카이브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아카이브와 작품의 차이를 다음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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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 <에이 비 에이 비디오(ABA video)>,
Video Installation(single channel video, 12 channel audio), 2016.

주로 음악을 주제로 다루는 오민의 <에이 비 에이 비디오(ABA video, 2016)>는 음악의 구조에 대한 해석을 한 영상 작업이다. 음악의 구조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다양한 물건들의 소리를 통해 청각적 효과까지 느낄 수 있는 작업이다. 본 전시에서는 여러 영상 작품들의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오민의 작품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기는 어려웠다. 오직 시각적인 부분만 감상이 가능했다. 헤드셋을 통해 소리에 집중하여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 영상 아카이브와 달리 이번 전시에서는 설치된 영상 오브제로서 오민의 작품이 기능했음을 비교하며 살펴볼 수 있었다.

스크린샷 2019-08-19 오전 11.07.01정연두, <상록타워(2001)>,
(왼)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설치된 영상,

(오) 2014-2015《아시아 현대 사진전》 대구미술관 전시 설치 전경.

정연두의 <상록타워> 또한 전시의 오브제로서 설치될 때와 영상 아카이브로서 남게 될 때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왼쪽의 사진은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에 설치되었던 단채널 영상이다. 본 전시에서는 정연두의 작품을 다른 영상 작업들과 함께 랜덤하게 설치되어 한 화면에서만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기에 영상 아카이브를 관람할 때와 특별한 차이 없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연두의 <상록타워>는 어떤 방식으로 전시하는가에 따라서 관람자가 작품을 감상할 때의 관점에 변화를 준다. 오른쪽 사진은 2012-2015년도 대구미술관 전시 설치 전경이다. 대구미술관에서 진행된 《아시아 현대 사진전》은 <상록타워>를 실질적 아파트의 층별 공간을 보는 것과 같이 여러 화면을 위아래로 부분적으로 설치하어 동시다발적으로 아파트를 바라볼 때와 같이 연출하여 전시 공간 안에서 그의 작품의 의도를 명확히 전달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예술은 디지털화되며 복제가 가능해졌고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의 변화는 기존에 우리가 느꼈던 예술의 아우라를 죽음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볼 때와 그 작품을 디지털 화면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이제 예술의 아우라는 다양한 형태로 다시 귀환하고 있다. 예술작품이 데이터베이스(아카이브)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작품이 디지털 매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일한 작품을 아카이브하고 전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술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와 그것이 아카이브화되어 자료가 되었을 때 관람자가 느끼는 부분은 분명히 다르다. 아카이브로서의 작품은 영상 그 자체만을 보게 하는 것이며, 전시에서 설치되는 작품은 전시의 서사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디지털 예술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를 통해 우리는 디지털 미디어 아트의 이러한 특징과 그것이 작품이 될 때와 아카이브 자료가 될 때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 영상들의 모든 소리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아우성과 무한히 반복되고 있는 영상 작품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우리는 단지 전시가 의도한 작품의 부분만을 관람할 수 있다. 전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해당 작품을 받아들이게 되는 방식에 차이를 경험한다. 아트 뮤지엄이 아키비스트가 되어 아카이브한 작품들과 그 작품이 설치된 작품으로서의 영상을 비교할 수 있도록 열어놓은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를 통해 미디어의 경계 없음이 만들어내는 작품의 아카이브화의 그 경계와 경계 없음을 느껴보길 바란다.

<참고문헌>
베르나르 스티글러, 「기억」, W.J.T. 미첼, B.N. 핸슨 (편), 『미디어 비평용어 21』, 정연심 외 (역), 경기: 미진사, 2005, pp. 95-116.
이종흡, 「서양 기록학계의 기억담론 아카이브 병을 전후로」, 『역사와 경계』 109 (2018), pp. 453-487.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 전시 서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9.

<전시정보 –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
전시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디지털정보실 3층 디지털아카이브
전시기간: 2019.05.30-2019.08.25.

editor 이 다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