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공간에서 느끼는 찰나의 숭고

김주옥(홍익대학교, 예술학)

강태환 작가의 작업에서 보이는 무수한 광섬유는 일정하게 좁은 간격을 두고 위에서 아래로 늘어지고 있다. 세밀한 광섬유의 끈 사이로 미세한 바람이 들락거리고 약간의 반짝거림이 우리 눈앞에 아른거린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 작은 반짝임은 꽤 전시장의 공간 안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강압적이지 않은듯하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이 방식은 그냥 단지 이 공간에 놓여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을 뿐이다.
이렇게 작가가 미술관 전시장의 한 공간에 우리를 초대할 때 우리는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을 체험한다. 미술관이라는 현실 속 특수한 공간은 이미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이지만, 이 공간에 들어선 관람객들은 거대한 동시에 가녀린 끈들의 존재적 가벼움과 함께 어디에서 오는지도 파악하기 힘든 숭고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에서 느껴지는 찰나의 숭고함은 서로 양립되는 감정들이 뒤엉켜 무언가 다른 공간의 다른 시간을 만들어낸다.

헤테로토피아적 공간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은 분명 유토피아의 공간과는 다르다. 푸코가 현실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공간을 유토피아라고 했던 것과는 달리 헤테로토피아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언어적 질서가 해체되는, 상징계의 질서를 넘어서는 공간이다. 푸코는 이러한 헤테로토피아가 무언가 ‘다른’ 공간이며 이형(異形)의 공간이자 이종(異種)의 공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전시장에 설치된 강태환 작가의 작업에서 보이는 규칙적인 광섬유의 나열과 그 안에서 신기루처럼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은 우리에게 계속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가느다란 빛들이 풍기는 아슬아슬한 위기감과 현실 속 존재하는 일탈의 순간적 신비를 동시에 선사한다. 작가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 공간이 아닌 불현듯 일상 속 전시장에서 예고 없이 나타나는 잠깐의 빛의 체험으로 유토피아적 질서에 대항한다. 이처럼 작가는 너무나 현실적인 공간에서 비현실적 공간체험을 준다는 점에서 지극히 헤테로토피아적 질서를 선택한 듯하다.
헤테로토피아가 변형된 공간이자 열린 공간이며 동시에 중첩의 공간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듯이 헤테로토피아는 이형 공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자기 배려 주체의 공간’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김분선, 「자기 배려 주체의 공간, 헤테로토피아」, 『근대철학』 10 (2017. 10), 서양근대철학회, pp. 107-109.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의 고유한 성질을 ‘불안’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때의 불안은 주체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헤테로토피아의 질서와 연관성을 보인다. 헤테로토피아는 ‘일탈’을 경험한 주체의 불안을 통해 헤테로토피아로 수용된다. 앞의 논문, pp. 112-113.
쾌락의 끝에는 불안이 존재하며 그 불안은 자신에 대한 숙고를 다시금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단지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주체의 자기 확인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강태환 작가의 작업을 통해 체험하는 공간을 유토피아가 아닌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헤테로토피아적 경험은 ‘나’라는 주체를 확인하는 시간이자 반짝거리는 빛을 느끼는 황홀함의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명멸하는 빛의 시간성을 통해 영속적인 동시에 결코 무한하지 않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숭고의 순간
필자는 강태환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그 경험을 ‘숭고(Sublime)’한 감정을 얻는 순간이라 표현하고 싶다. 숭고함을 느낀다는 것은 아름다움에 매료당하는 것과 같은듯하지만 다르다. 숭고함은 감동을 느끼는 순간에 발동하는 것이고 이는 결코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 숭고함은 마치 헤테로토피아에서 느껴지는 현실 속의 비현실적 체험과 같이 평온하고 끝없이 안정된 지속에서 얻어질 수 없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쾌’와 ‘고통’을 분석하며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는데, 숭고의 원천을 고통과 위험의 순간에 느껴지는, 마치 공포와 비슷한 방식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쾌와 고통에 대한 미학적 탐구』, 김혜련 옮김, 한길사, 2010, p. 103.
아름다운 것은 대개 부드럽고 매끄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숭고함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은 크고 거칠다. 이처럼 숭고와 아름다움은 상반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즉 숭고는 고통에 기초하고 아름다움은 쾌에 기초하는 것이다. 앞 책, p. 216.
우리가 전시장에 들어서서 느끼는 신기루와 같은 빛, 지속적으로 반짝임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공중에서 부유하는 그 빛은 전시장에 있는 우리의 제한된 시간 속에서 순간순간 감각의 자각과 일깨움을 준다. 이 순간을 필자는 ‘숭고의 순간’이라 칭하겠다.
앞에서 버크의 숭고를 통해 숭고의 순간을 말했다면 이는 아름다움과는 다른 숭고함이라는 의미에서 칸트가 생각과도 유사점을 보인다. 칸트는 숭고함을 공포, 고상함, 화려함 모두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칸트에게 숭고라는 감정은 단순히 고요한 평원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것이었다. 아름다움과 숭고의 가장 큰 차이라면 아름다움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인 반면 숭고함은 감동을 준다. 이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05, p. 15.
그리고 때때로 숭고는 전율이나 우울함 속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앞 책, p. 23.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이 작가의 작업 앞에 서면 처음에는 반짝이는 빛의 순간을 체험하며 황홀함을 느낀다. 하지만 곧이어 관객은 적잖이 주체의 자기 확인 과정을 거치며 전율과 실체를 잡을 수 없는 그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쾌의 끝에는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순간이 도래하듯 말이다. 모든 예술작품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상징계 저편의 질서를 품고 있겠지만 이 작업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은 아름답다고만 치부할 수 없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또한 장 프랑수와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는 숭고를 느끼는 감정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언어적으로 생각하여 개념을 만들거나 이념을 형성하는 것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감각과 그 숭고를 느끼는 감정을 연관시켰다. 리오타르가 감각을 이야기한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기 위해 언어의 사유법을 사용하지만, 감각은 그 상태를 정의하고 한정하는 주관적 입장과는 반대로 인식에서 벗어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장 프랑수와 리오타르,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김광명 옮김, 현대미학사, 1995, p. 24.
이처럼 강태환 작가의 작업을 보며 느끼는 감각은 아름답다고 코드화된 언어적 질서의 지각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에서 우리를 다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게 하는 것처럼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내는 감각적 작용이다.

헤테로토피아적 숭고
그렇기 때문에 강태환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숭고는 헤테로토피아적 숭고이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를 설명하며 이 공간은 이종적 공간인 동시에 ‘다른’ 공간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은 순수한 쾌가 아닌 쾌와 불쾌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강태환이 만든 공간이 현실에서 벗어나 영원히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그것은 숭고의 체험을 주지 않을 것이다. 숭고는 앞에서 본 것처럼 긍정이자 부정이고 찰나에 존재하는 행복감이다. 그 찰나는 평범한 현실 속에서 신기루처럼 등장하는 잠깐의 행복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헤테로토피아가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잠깐의 한정된 경험임을 생각할 때, 마치 광섬유의 반짝임이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닌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현실 속 행복한 찰나의 경험을 선사한다. 전시장의 공간의 중앙을 자리 잡고 있는 그러한 반짝임은 광섬유들이 가지고 있는 사이사이의 틈처럼 완벽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참고문헌
김분선, 「자기 배려 주체의 공간, 헤테로토피아」, 『근대철학』 10 (2017. 10), 서양근대철학회, pp. 105-134.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쾌와 고통에 대한 미학적 탐구』, 김혜련 옮김, 한길사, 2010.

이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05.

장 프랑수와 리오타르,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김광명 옮김, 현대미학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