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로 사유하는 장소-3] 사진을 통한 장소의 토포스(topos)와 아토포스(atopos)

 

 토포스(topos)는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이러한 토포스는 문학의 영역에서 자주 반복되는 몇 개의 모티프(motif)들을 지칭한다. 이는 고정형이며, 진부한 문구를 뜻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아토포스(atopos)는 토포스에 결여의 의미가 포함된 접두사 α를 덧붙인 것으로, 어떠한 장소에 고정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롤랑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1915-1980)는 자신의 저서,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에 대해 상투적인 토포스를 제거해야하고, 흔들리며, 초월하고, 철수하게 만드는 아토포스를 지향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떠한 담론이나 결론도 부재하는 사랑이라는 그 ‘관계‘에 있어서 말이다. 사진 역시 그러하다. 사진이 대상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생각은 현재에 와서는 진부해져버렸음에도 우리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토포스의 영역 안에 있다. 따라서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사진이라는 매체와 그 속에 등장하는 장소가 어떻게 토포스를 넘어 아토포스로 기능하는지 사유해보고자 한다.

 

칸디다 회퍼, Teatro Olimpico Vicenza, 2010칸디다 회퍼, <Teatro Olimpico Vicenza>, 2010

칸디다 회퍼, BNF Paris ⅩⅢ, 1998칸디다 회퍼,< BNF Paris>, 1998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 1944-)는 건축물에서도 내부 공간을 사진에 담는다. 그가 다루는 장소는 공공 도서관이나 박물관, 오페라 극장, 궁전, 대성당, 은행 등 공공의 공간이다. 하지만 공공의 공간 속에는 어떠한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장소는 텅 비어있다. 회퍼는 공간에 어떠한 연출도 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어떠한 우연도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사진은 객관적인 시선의 반영으로 출발하지만 사진이라는 매체는 장소 속에 담긴 시간성과 공간성을 환기시키며, 가늠하도록 유도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사진이 가지고 있는 객관성의 담보를 역설적으로 뒤엎어버리는 것이다. 공적 세계는 사진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개인의 사적 세계로 유입되어 들어오며, 시각적 객관성은 작품을 바라보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익명의 인물들과 분위기, 역사와 정신으로 꽉 차게 된다.

 회퍼의 작업에는 물리적으로 현전하는 장소에 대한 일시적인 측면, 즉 가시적인 공간을 무의미하게 지나쳐버리는 것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다. 무언가를 관람하기 위해, 혹은 기도하기 위해 또는 특정한 업무를 해결하기 위해 방문했던 장소는 사진으로 담김과 동시에 그 일시적 속성을 잃어버리며, 장소에 대한 시간성은 한없이 늘어진다. 늘어진 시간 속에서 관람자는 사진이 지시하고 있는 공간 속에서 역사를 쌓는 작업을 진행한다. 결과적으로 회퍼의 사진은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Paris, Monparnasse, 1993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Paris, Monparnasse>, 1993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1955-) 역시 장소와 공간에 대한 사진 작업을 해나간다. 그가 주로 다루는 공간은 대형마트의 진열장이나 정형화된 사무 공간 또는 획일화 된 아파트 구조 등이다. 그 속에서 구르스키는 획일화와 유형적 그리드(Typological Grids)를 현대적 속성으로 포착하였다. 수직과 수평의 요소들이 부각된 사진 속 형태는 현기증을 유발시킬 정도로 꽉 차있다. 여기서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건물이 마치 우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가 속한 게슈탈트가 어떠한 형태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진은 이러한 요소들을 전체적 형태로 포착하며, 나아가 현대인의 삶에 대해 환기시키며 또한 정신을 구속시킨다.

 구르스키가 구현하는 또 다른 장소인 항만과 고속도로, 다리, 공항, 호텔과 같은 빠른 시간성을 전제로 하는 장소이다. 마크 오제(Marc Auge, 1935-)는 이러한 장소들을 가리켜 비장소(Non-place)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비장소들은 스쳐지나갈 뿐인 장소이며,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과거와는 분리된 채 오직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장소는 개인의 상실을 암시한다. 구르스키가 포착하는 장소들은 이런 비장소적 속성을 드러내며, 그렇게 비장소는 사진과 만나 장소로써 우리 눈앞에 현전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장소, 또한 분명히 존재해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실제로는 숨이 막힐 듯한 장소를 우리로 하여금 가시화시켜주는 것이다.

 

타렉 알-구세인, Untitled 2 From Self-Portrait Series, 2002-2003타렉 알-구세인, <Untitled 2 From Self-Portrait Series>, 2002-2003

타렉 알-구세인, Untitled 9 From Self Portrait Series, 2002-2003타렉 알-구세인, <Untitled 9 From Self Portrait Series>, 2002-2003

 앞서 살펴본 작가들과는 다른 양상의 사진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타렉 알-구세인(Tarek Al-Ghussein, 1962-)의 주요 관심사는 중동이라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관한 것이다. 테러와 분단, 폭력이라는 명사가 중동 지역의 꼬리표가 되어버리는 현실에 대해 그는 사진으로 맞선다. 사진 속에는 특정 장소와 함께 인물이 등장한다. 인물은 검은 옷에 케비예(아랍에서 사용하는 터번 모양의 천) 차림이다. 인물이 속해있는 특정 장소가 함의하는 바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중립적인 의미의 장소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담, 경계, 전쟁 후의 폐허로 둔갑한다. 이는 사진 속 인물의 정체성으로 인해 특정 공간의 의미가 채워지는 과정을 드러낸다. 알-구세인의 사진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과정인 것이다. 결국 고정된 이미지는 다성적인 목소리로 채워지며 우리의 편견과 사회, 정치적 요소들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로 기능한다.

 

조르주 루스, Sargadelos, 2001조르주 루스, <Sargadelos>, 2001

 이전에 인터랩 칼럼에서 소개된 적 있는 조르주 루스(Georges Rousse, 1947-) 역시 사진을 통해 공간을 대한 사유한다. 루스의 사진 속에 존재하는 공간은 혼재되어 있다. 사진에 등장하는 장소는 먼저 작가가 선택한 그 장소와 셔터를 눌렀을 때 포착된 장소, 그리고 작가의 손을 거쳐 구현된 최종적인 장소로 이루어진다. 이는 작가 앞에 현전하는 장소가 시선을 만나 변형되며 나아가 사진을 만나 또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관람자 앞에 구현된 장소는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된 원근법적 시야를 반영한다. 원근법적 시야로의 귀결은 심오한 무언가를 암시하기도 한다. 장소의 변형과 재생산이 결국 인간의 고정적인 시야로 들어오면서 그 의미는 표류하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물리적인 속성을 전제로 하는 장소의 속성과 실제의 반영이라는 사진의 토포스적인 속성과도 관련이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사진을 통해 장소와 공간이 사진이라는 매체로 구현되면서 어떠한 의미를 생산하고, 또 어떠한 공간의 층위로 인도하는지 알아보았다. 사진과 장소는 근본적으로 물적 증거를 기반으로 한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눈앞에 현전하기에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 그 자체로 간주되기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 자체는 아니며, 또 보이는 것이 아는 것도 아니며, 알더라도 그게 다가 아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진과 장소에 대한 사유를 통해 인간의 앎과 존재 자체에 대한 사유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 모색은 토포스적 사유를 넘어서 아토포스적 사유와 관련이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사진이라는 고정성이 함의할 수 있는 층위는 무수하다는 것을 환기하였으며, 그 사진 속에 담긴 장소는 사진이라는 공간 속에 담기면서 다층적인 것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데에 의의를 가진다.

 

editor 하 혜 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