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미술 아닌 것(?)-5] 관객20170810_134742

1.

일종의 불가침의 영역처럼 미술작품, 특히 일반적인 예술작품의 경우는 관객들 사이에 거리가 전제된다. 손을 대지 말라는 식으로, 그 말인즉슨 “눈으로만 봐주세요”라고 흔히 보듯 관객들의 작품을 향한 경험을 시각적인 장 안에서만 머물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관람객이 다소 능동적으로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카메라를 들고 전시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미술관에서 우리는 트릭아이 뮤지엄처럼 내가 그곳에서 프레임 안에 들어가 피사체가 되는 것과 달리, 카메라를 들고 당당하게 작품으로 다가간다.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서 같은 각도에서 여러 번 찍고, 또 다른 각도에서 찍기. 일종의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갖춘 상태로, 여기서 카메라의 시선은 예술작품과 관객의 ‘실제’ 거리(이자 감상방식에 의한 심리적 거리)를 조금씩 좁혀나간다. 근접촬영이 금지되고 줄을 그어 못 들어가게 막아놓고, 또 심지어 여러 관객들 때문에 작품이 보이지 않는 경우에도 카메라의 포커스는 그 표면에 닿을만큼 다가갈 수 있다―누구의 시선을 신경쓸 이유도 없이. 이로써 (예컨대) 자코메티의 오브제에서 우러나오는 고독(함)은 이제 작품을 향한 시선의 침투를 통해 한층 더 강조된다. 그 고독함을 마주했을 때 내가 느끼는 연민 대신, 관람객은 그 자리에서 볼거리가 된 작품의 ‘적나라함’을 기록한다―인간 실존(l’existence)은 타자에 노출되어 오늘날, 경험의 지표로서 SNS 속에서 작동하게 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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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거리 좁히기는 수동적인 관람객을 카메라를 통해 활발하게 만든다. 이는 메이겐(Meigen, 明源)이 의 작업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데, 여기서 특기할 만한 부분은 바로 손부터 시작해 신체의 전체 동작이 활발하게 찍힌 두 명의 퍼포머를 찍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화면에 퍼포머의 동작뿐만 아니라 그것을 찍는 촬영자가 같이 나온다. 작품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배우처럼 활발하게 찍힌다는 점이다. 어쩌면 어크로버틱하게 보일 정도로 카메라는 표적을 향해 접근하고 초점을 맞추려고 (두 퍼포머 역시 활발하게 움직이기에 더더욱) 애쓴다. 속도를 증가시켜 영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두 퍼포머와 달리 카메라를 든 사람은 과한 동작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은 마치 오늘날 카메라를 들고 작품에 두려움 없이 다가가는 관객들의 모습과도 같다. 이는 촬영된 사진에 나오는 광학적 무의식과 달리, 촬영자의 신체 동작이 무의식적으로 활발하게 찍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 순간을 그 순간에 포착하기 위해 신체는 따라 잡으려고 애를 쓴다. 따라서 이 작업은 활발한 움직임을 담으려면 카메라와 동시에 촬영자 역시나 움직여야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침잠의 감상방식이 아닌, 최근의 영상작업 전시와 연결되어 관객이 동선과 타임라인을 보다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주체로서 작품에 관여하는 것을 보여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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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작품을 피사체로 보고 카메라로 기록하는 관객들은, 사진에 찍힌 피사체를 소유한다기보다는 타임라인에 업로드되는 본인들의 ‘경험’을 소유한다. 아마도 자코메티의 조각을 찍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작품을 사진으로 간직한다기보다, 내가 미술관에서 이런 작품을 봤다는 ‘더 내적인’ 경험으로 간직한다. 일찍이 사진가 토머스 루프(Thomas Ruff)가 초상사진을 보고 ‘인물의 사진’이 아니라 ‘인물’로 여겨졌을 때 생긴 의문이 크기의 문제―더 이상 간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체로서 드러난 거대한 사진―와 연관이 있었다면, 셀카는 이미지의 데이터화, 그리고 각종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방식의 탄생으로 ‘나와 어떠어떠한 관련이 있는 이미지’로, 즉 촬영자의 삶을 구성하고 요소이자 그것을 명시해주는 지표가 되었다. 이 환경에서는 물건만 사진으로 담을 때 조차 촬영자와 관련이 있는 이미지괴 되며, 이미지와 그 사람이 더 직접적으로 맺는 관계를 #해쉬태그와 키워드를 통해 삶의 연결망을 재/구성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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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쉬태그는 촬영자의 삶을 구성함과 동시에 재구성을 한다. 내가 붙인 해쉬태그를 클릭하면 동일하거나 비슷한 공감대를 소유한 다른 사용자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구성요소가 되는 키워드들은 다른 사용자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의식조차 못했던 시점에서, 타인의 삶에 등장하고 있다. 그때 그 위치에서 의식조차 못 했더라도, 해쉬태그를 통해 나와 타인의 삶 사이에 틈새가 생기고 나의 삶이 거기에 사후적으로 끼어들어가게 되면 내가 보낸 타임라인에 변화가 생긴다―그때 거기에 같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이미지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영상 작가 토모토시(Tomotosi, トモトシ)의 인스타그램 작업 <photobomber_tomotosi>는 시부야에 있는 강아지 동상, 하치코에 몰래 찍히는 결과물이다. 작가는 해쉬태그(#hachiko, #hachikostatue)를 통해 의도치 않게 자신이 찍힌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따라서 계정 photobomber_tomotosi는 타자의 이미지들로부터 ‘추출된’ 프로필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강아지 하치코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작가 또한 촬영자를 기다리고 있는 부분이다. 다만 강아지와 달리, 찾아온 촬영자는 작가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때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타임라인을 통해 사후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 인식 못한 만남은 해쉬태그를 통해, 단순한 배경에서 추출되어 어떤 작가와 작업을 이루는 요소로 부각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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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침투를 통해 작품에 대한 관객의 접근을 허락해주었다면, 다른 한편에서 작품을 소유하는 일을 통해 진열장을 깨는 힘도 발휘한다. 예컨대 시타미치 모토유키(Shitamichi Motoyuki, 下道基行)의 작업 <새로운 석기>은 소유라는 행위를 통해서 작품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일견 ‘새롭다’는 수식어와 ‘석기’이라는 단어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두 단어의 조합은 골동품의 본질과 상반된다. 골동품은 구매자 손으로 넘겨질 때 새로운 가치로 작동되는, 즉 원래 보유하는 가치를 거부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컨대 아버지가 수집해온 옛날 우표를 아깝다고 여겨 엽서에 붙이면 혼나는 것처럼, 기존의 쓸모/사용성을 거부당하고 감상용으로 향유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 이와 달리 작가가 제시하는 ‘석기’는 어떤 가치를 시각장 안에 머물지 않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돌멩이들은 관객들이 구매하고 골동품처럼 감상용으로 자리잡을지, 아니면 도래할 쓰임새를 향해 열려 있는 새로움인지, 이 두 가지의 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 가능성들이 바로 <새로운 석기>의 내재적인 가치, 즉 잠재성이다.

여기까지, 관객이 작품에 관여하는 두 방식, 즉 기록과 소유는 관객이 예술작품을 통제한다는 것과 다르다. 오히려 예술작품의 기존의 위치가 변화되면서 예술작품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사후적인 의문으로 연결된다. 유일하게 촬영 가능했던 공간에서 기록한 자코메티의 조각상은, 나의 타임라인에서 경험의 지표로서 작품의 재현보다 한층 더 두드러진다. 여전히 작품인지 아니면 새로운 쓰임새를 부여받을 것인지는, 대부분의 예술작품이 소유될 때 작품으로서 구매되고 또 감상용으로 취급되는 전제에서 배제된 쓰임새에 대한 물음을 다시 부각시킨다. 관객이 전시를 보고 또 기록하거나 작품을 구매하고 소유할 때, 예술작품은 어떻게 다르게 수용될 것인가. 그 변화와 전이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