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무 노구치의 공공예술: 예술작품 바깥에서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는 일본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예술가이다. 그는 조각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건축가와의 협업을 비롯하여 다양한 삼차원 작업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조각’의 범주와 ‘다양한 작업’은 60년대 비평에 이사무 노구치는 특징을 규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는 1968년에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개인전의 평론을 보아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도우스 2003). 일반적으로 이사무 노구치를 언급할 때 가장 언급되는 부분이 그의 정원 프로젝트와 일본 정원이 갖는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이사무 노구치가 미국계 일본인이며, 그가 일본에서 생활하고 작업을 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그 연관성을 고려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일본 정원과 동일하다고만 볼 수 없는데, 예를 들어 일본 정원사 장인을 초청하고 공동 작업한 <유네스코 정원>(1956-58)(밑의 이미지)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기법과 크게 달라서 장인이 화를 냈다는 사실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품은 확실히 절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사무 노구치의 작업을 일본성과 연결시키려는 태도는 그의 절충적인 성장배경뿐만 아니라 작업의 방향성 또한 모더니즘 조각으로 환원시키는 일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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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은 형식적으로 모더니즘 조각 형태이다. 하지만 그는 작품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보지 않고 작품과 감상자의 상호작용, 그 중에서도 특히 신체현상학적인 측면을 고려했다. 사실 기념비를 통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도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şi) 작업에도 해당된다. 브랑쿠시 밑에서 공부를 한 시기가 1927년이며 이때 노구치는 처음으로 돌을 다루는 보조 역할을 경험한다. 이후 약 10년 넘게 시간이 흐른 1936년에 쓴 에세이 「조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What’s the Matter with Sculpture?)」에서 그는 조각가는 순수예술 말고 현실에 눈을 돌리라고 권고한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업 <News>(1928-40)에서 볼 수 있듯이 형식적으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주제가 반영되어 있다. 추상조각으로 불리는 그의 작업과 이 시기의 작업은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조각의 출발점은 바로 ‘감상자’를 전제로 하는 ‘순수미술’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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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 작품에 내용이 반영된 시기가 지나면서 노구치 작업은 사용성(use)을 고려한 성격으로 전개된다. 이는 사람들에게 좀 더 직접적인 액션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단계라 말할 수 있다. 일찍이 그는 안무가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의 무대 장치를 제작하였다. 1935년에 처음으로 그레이엄은 노구치에게 무대장치 및 디자인을 의뢰하였고 1944년에 대표작 <애팔래치아의 봄>(1944), 그리고 조각적인 요소가 더 많이 들어간 <Herodiate>(밑의 이미지)을 선보인다. 여기서 작품은 ‘무대작업(안무는 그레이엄, 무대장치는 노구치, 그리고 음악은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가 담당)’이라는 일종의 종합 예술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레이엄의 작품에서 노구치의 작업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춤 동작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매개체로서 ‘사용’된다. 이러한 측면은 나중에 정원 프로젝트에서 건축가들과의 협동작업으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그가 생각하는 ‘대지를 조각하기’는 사람들에게 보다 신체적인 반응으로 이끌어준다. 조각된 대상은 이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다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요컨대 <News>와 일련의 무대작업, 더 나아가 정원 프로젝트까지 아울러, 노구치는 시각적으로 감상되는 차원에 머무르는 대상이 아닌, 보는 사람에게 동력을 주는(driving) 매개체로 조각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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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조각자체가 아닌 그 주변부 또한 고려한 예시를 ‘공공’의 맥락에서 묶어 각각 살펴본다. 이는 형식적으로 크게 두 정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원 프로젝트이며,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걷고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걷기-이동-정원 프로젝트’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공공조각이며 이것은 작품과 어울려 놀 수 있어 ‘놀이-(작품과) 어울림-공공조각’으로 볼 수 있다. 일찍이 <뉴스>에서 선보이던 대중들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추상조각을 통해 나타나는지, 유형별로 분석하고자 한다.

 

1) 정원 프로젝트

“노구치의 본령은 (조각보다) 더 넓고 건축적인 공간 혹은 도시적 공간에 도전할 때에 발휘된다.” 이는 미국 건축가의 고든 번샤프트(Gordon Bunshaft)가 공공작업을 요청한 당시 한 말이다. 그가 하는 말이 단순히 조각과 건축 환경을 비교하여 후자가 더 공간적으로 넓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볼 때 작품이 조각자체보다 더 넓은 영역인 주변환경에 걸쳐 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번샤프트는 설계 단계에서 이사무와 함께 작업을 하며 <체이스 맨허튼 은행 본사>(1964)에 그 최종적인 결과물을 볼 수 있다. 번샤프트뿐만 아니라, 당시 교류가 있던 건축가 쇼지 사다오(Shoji Sadao, 이사무 노구치 재단 전 이사장) 또한 마찬가지로 노구치는 건축가와의 협동제작 과정에서 건축 설계안 자체를 변화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노구치의 다른 작업 <리더즈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도쿄지사 정원>는 1951년에 건축가 안토닌 레몬드(Antonin Raymond)와 협업하여 진행되었으며, 이 외에 1958년 파리에 완성된 <유네스코 정원>을 비롯하여 1964년부터 설계안을 제작한 <IBM 본사 정원>을 보면, 건축물에 정원의 요소를 끌어들인 협동작업의 여러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설계안에 그치고 만 건축가 루이스 칸(Luis Kahn)과의 프로젝트,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놀이공원(Riverside Drive Park Playground)>(1961)(밑의 이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노구치가 만드는 공간은 주거형태보다는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오고 그곳에서 걷고 쉴 수 있는 기능에 관심이 많았다. 이사무 노구치는, 1950년 일본에 왔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건축과 정원의, 정원과 조각의, 조각과 인간의, 인간과 집단사회의 […] 각각 서로 타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야만 한다. 그것에 바로 새로운 미술가의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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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미술가’는 어쩌면 당대적인 새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밖에 안 되는 1950년 일본에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이미 <뉴스>에서 선보였던 것처럼, 예술의 자율성에서 벗어나오는 태도로 직결된다. 시기적으로 볼 때 이 말은 실제로 진행된 프로젝트 (실현되지 못한 프로젝트)에 앞서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생각은 갑자기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공간에 대한 사유는 이는 30년대 초에 무렵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34년에 노구치는 <괭이 모뉴먼트>의 스케치를 보냈다. 이는 제2차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예술가들에게 공공 프로젝트를 요청한 것 사례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 작가는 전형적인 조각가의 범주를 넘어서 광범한 대지를 작품의 재료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삼각형 피라미드 모양의 프로젝트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놀이동산>의 제안서를 제시했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괭이 모뉴먼트>를 닮은 것이지만 겨울이면 썰매를, 여름이면 물을 내리고 미끄럼틀을 타고 놀 수 있는 작품으로 제안했다. 즉 모뉴먼트의 정신적인 호소력이 육체적인 호소력으로 변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공간 기능에 대한 그의 관심은 초기 작품과 진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나중에 조각가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은 활동으로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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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놀이기구

앞서 살펴본 <놀이동산>에서 공간의 기능성에 주목하였는데 이는 개별적 작품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즉 하나의 작품을 작품(Art Work) 자체의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이느냐에 주목한 것이다. 일찍이 마사 그레이엄의 무대장치를 디자인한 것부터 시작하여 조각의 쓰임새에 주목한 노구치는 놀이기구로서의 조각을 통해 기능성을 제시한다. 이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작업으로 1986년의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공개된 <슬라이드 만트라(Slide Mantra)>(1986)(위의 사진)가 있다. 형식적으로 장식적이지 않고 단순한 색깔을 띤 이 작품은 미끄럼틀로서 실제로 탈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만년의 대표 작업 <모에레누마 공원>(2005)에 가 보면 그가 디자인한 놀이기구가 넓은 공간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삼각형 피라미드의 모습(<놀이동산>)과 놀이기구에서 사람들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데, 이는 권력의 상징인 피라미드를 해체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놀이기구에 대한 관심은 <모에레누마 공원>에서 절정에 다다르지만, 1934년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이미 그의 생각이 결정화되었다고 확인할 수 있다.

<괭이 모뉴먼트>와 <놀이동산>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공간 혹은 조각에 대한 기능을 50년 전에 이미 모색하고 있었다. 즉 작품의 조형에 눈을 돌리는 감상방식이 아닌, 몸소 쓰임새를 작동시키는 작품을 당대 조각에 찾고 있었다. 정치적인 ‘의미’를 포함한 벽화에서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는 ‘신체성’으로 옮겨가면서 ‘액션 주기’의 방향성은 변하지만 말이다. 그가 처음에 조각에서 부여한 ‘의미’는 어떻게 보면 나중에 신체적인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정치적인 색깔이 바래졌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작품을 몸소 경험한다는 특성을 추가함으로써 이사무 노구치는 사실 예술작품자체에 대한 불가침의 영역에 손을 직접 대고 있다. 그것은 기울어진 리처드 세라의 작업보다 덜 위협적이인(“지나가다 쓰러지진 않겠지??”와 같은) 방식으로 관객들을 유도한다.

Konno Yu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