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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오페라시티 아트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이사무 노구치: 조각에서 신체, 정원으로>는 작가 이사무 노구치의 다양한 작업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순수미술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시각적으로는 순수미술처럼 보이는 작품을 둘러싼 환경이나 관객에게 주목을 돌렸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공공예술, 예술 장르의 융합, 그리고 예술 프로젝트를 비롯한 키워드를 통해 오늘날 다시 주목해볼 수 있다. 현대무용 공연 무대를 꾸미기도 하고, 도시 공간에 설치와 구조물을 통해서 유동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조각에서 신체, 정원으로>라는 타이틀은 이사무 노구치의 작업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작품자체에서부터 관객을 둘러싼 환경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적합한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시회 제목은 외연으로 확장되는 이사무 노구치의 작업이 포섭되는 전개과정을 잘 짚고 있다. 조각을 설치되는 환경과 고려하여 진행한 여러 프로젝트를 보면 전시 타이틀이 단순히 작업양상의 ‘이행’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 <모에레 누마 공원>을 일종의 큰 정원으로 보았을 때, 이 정원에서 조각과 신체는 배제되지 않는다. 단순한 발전 혹은 이행도 아닌, 전의 것들을 같이 아우르는 의미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이 타이틀은 가치를 갖는다.

전시장에서 초기 드로잉에 찾을 수 있는 약동감에서 마사 그레이엄의 현대무용 무대 장식/장치로 연결되는 부분은 흥미롭다. ‘조각에서 신체’, 즉 ‘조각에서 신체(성)를’ 읽어내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조각에서부터 춤 추는 신체’와 어우러지는 점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마치 카테고리처럼 나누어 구성함에 따라 전등(아카리) 작업이 주제에 맥락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신체의 변형? 조각? 정원? 이 세 키워드 모두에 맞떨어지지 않는다. 이 엉성함은 아무래도 타이틀에 들어간 ‘조각’의 상정값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아카리 작업을 놓고 ‘빛의 조각’이라 부르는 일은 쉽지만 여기서 왜 조각이라 불러야 하는지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 빛을 깎아낼 수도 붙일 수도 없는데 이 작업에서 어떤 부분이 조각인지, 만약에 이 시리즈가 조각이면 댄 플레빈(Dan Flavin) 더 나아가 앤소니 맥콜(Anthony McCall)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오브제가 아닌 조각이라 굳이 설명과 제목에 쓴 이유를 다시 한 번 고민할 필요가 있다. 두 작가와 아카리가 다른 점은 궁극적으로 이사무 노구치에게 조형적인 요소, 즉 빛이 안에서 확산되는 얇은 종이에서 오는 조형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이는 공간적인 요소, 즉 설치물을 통해 공간으로 빛이 확장되는 플레빈 작업의 특징, 바닥을 스크린처럼 보되 빛이 나오는 근원과 투사되는 공간 사이를 조형화시킨 맥콜의 작업과 다르다. 이번 전시에서 ‘빛의 조각’이라는 말이 “왜 조각일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 빛의 조각이나 물, 혹은 소리의 조각이라는 말은 쉽게 또 널리 사용되지만, 다시 애초의 더 근본적인 부분에 주목해야 된다. 조각에서 출발했다면 여기서 조각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 상정 값을 다시 고려해야 된다. 이 부분만 고려를 했어도 이번 이사무 노구치 전시는 더 유의미했을 것이다. 예술가가 만든 것들이 오브제나 설치라 불릴 때, 그 단어의 상정값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신체와 정원과 관계를 맺는 더 근본적인 요소인 조각, 그 출발점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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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이사무 노구치의 작업, 즉 타이틀에 ‘조각’이라 불린 것을 어떻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까? 순수미술의 자율적인 것과 달리, 외연으로 확장하는 과정으로써 앞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간의 침범을 당하는, 그러니까 자율성을 거부하고 무대 장치로 쓰이고 공원 놀이기구로 쓰이는 물건이다. 이른바 조각에 물음표를 단 단계에서 우선적으로 고민을 시작해야 된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 왜 단순히 ‘산업제품’이 아닌 ‘빛의 조각’이라는 말로 아카리를 보여주고 이를 전시의 구성요소로 포함시킬까? 왜 그의 작업을 대지미술이나 환경예술, 심지어 오브제가 아니라 여기서 조각이라 부를까?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에서 방점을 찍어야 신체에서 정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다―만약에 그들이 아카리를 굳이 조각이라 부르고 싶다면.

courtesy: The Isamu Noguchi Foundation and Garden Museum, New York, The Isamu Noguchi Foundation of Japan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