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미조 시즈카 (Yokomizo Shizuka) <Stranger>에 대하여

사진은 흔히 어떤 장면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현장사진의 경우 구도나 명암대비를 통해 사진작업으로서 가치를 가질 수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그 사건을 전달해주는 매체로 기능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예술작품으로 취급되는 사진을 보면 기록과 표현방식은 서서히 후자쪽으로 경도되기 시작한다. 즉 단순한 기록을 본래 기계 혹은 매체가 갖는 순기능으로 볼 때, 이제는 기록될 대상을 꾸미고 준비하는 태도로 예술작품에 나타난다. 사진의 경우 실제의 기록에서 장면을 연출하며 또 후반처리―장면을 위한, 혹은 매체(성)를 부각시켜 보여주는―를 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한편 영상의 경우 퍼포먼스의 기록, TV(백남준)나 영사기(폴 샤리츠)처럼 지지체가 되는 매체(성)을 보여주는 단계에서 영상으로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로서 촬영되기도 한다. 사진과 영상을 가릴 필요 없이, 작가가 기록-표현하는 예술작품도 오늘날에 상당히 많다. 그런데 기록이건 기록-표현의 물건이건, 여기서 작품은 촬영주체로서가 아닌, 촬영주체가 생산한 것들로 간주된다. 사후적으로 따르는 작가의 태도는 작가 스스로의 존재를 기록하는 것과 다르다. 거기서 찍히는 대상은 주체가 만들어내건 그렇지 않건 어떤 장면이다.

이런 맥락을 짚어본 뒤에 요코미조 시즈카의 작업 <Stranger>를 분석할 경우, 그 작업이 행위의 단순한 기록, 그리고 기록물로서의 사진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작업은 작가가 어떤 거주자에게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창문 앞에 서달라는 요청을 편지를 부쳐 전달한다. 그러고 나서 작가는 그 사람이 허락해주었는지 모르는 채 그 시간에 장소를 찾아가 사람을 기다린다. 사전에 협의과정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사실상 이 작업은 촬영자의 요청이 (어쩔 수 없는 경우까지 포함해서) 거부당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작품은 찍는 행위가 실현된 사실 또한 기록하고 보여준다. 또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에게 행동을 요청하는 부분은 물론, 작가 스스로가 지정한 그 장소를 찾아다니는 점에서 수행성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업은 어떤 인물을 사진으로 기록한 사실 이상으로 작가의 수행(성)과 그에 따른 기록, 즉 성공적으로 촬영된 피사체를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이 사진작업을 단순한 기록으로 볼 수도 있다. 말하자면 모르는 사람을 촬영하는 퍼포먼스의 기록으로 쉽게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단순히’ 사진을 어떤 장면 혹은 퍼포먼스의 기록으로 간주해버리고 만다. 작가가 사진 매체를 통해 퍼포먼스적으로 어떤 인물을 찍는 일에서 나온 결과물은 평상시 찍는 스냅사진도 아니며 또 (영상 혹은 스틸 컷처럼) 퍼포먼스 자체의 기록도 아니다. <Stranger>는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시선을 보내며, 촬영자가 낯선 존재로서 시선을 받고 기록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진작업에서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이 집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획된 만남이지만, 거기서 대화도 나눌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작업이 진행되면서, 시선을 주고/받는, 바로 (시선을 보내는) 주체이자 동시에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된다. 이때 엿보기의 방식이 서로 애매해지는 단계에 들어선다. 즉 촬영자는 거주자가 사는 방은 물론, 애초부터 모르는 사람을 찍고, 반대로 피사체는 거기서 이상한 사람을 보듯 지켜본다(이 부분은 사진가 혼마 다카시Homma Takashi와 작가가 나눈 대화에서 서로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 작업이 일반적인 초상사진과 다른 부분은 바로, 렌즈로 대상을 겨냥한 사진가가 시선을 받고 피사체가 사진가를 낯선 사람으로 인식하고 시선을 보내는 점이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 찍히는 자」(밝은 방)에서 피사체가 카메라를 의식할 때 자신을 만든다는 점을 언급하는데, 그때 피사체가 된 내가 나를 낯설게 여기는 것과 달리, <Stranger>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이른바 주객‘모호’―전도가 아닌―가 일어난다.

이때 두 존재는 피사체이자 시선을 보내는 주체가 된다. 마치 어떤 사건현장-우연이 아닌 어느 정도 미리 정해진-을 보듯이 피사체는 방에서 촬영 행위의 목격자가 된다. 따라서 회화에서 초상화의 모티프가 되거나, 영상 기록물에서 인터뷰를 받는 관계가 아니라, 촬영자인 주체 또한 낯설게 시선을 받는다는 점에서 <Stranger>는 사진과 퍼포먼스의 미묘한 지점에서 주체를 재위치시키고 있다. 공간의 제약(내부와 외부, 사적과 공적)을 전제로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서로가 중립적으로 서게 되는 지점, 그것이 바로 이방인이다. 때문에 요코미조의 작업은 단순한 퍼포먼스의 기록이 아니라 촬영행위가 애초에 갖는 수동적인 적극정, 즉 ‘훔쳐보기’와 같은 보기의 방식을 피사체에게도 (심지어 같은 자리에서) 하게 만들며, 내가 보는 것과 나를 누가 보는 것 사이의 묘한 지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