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단과 축적의 미학: 박석원

박석원 개인전ㅣ2024.01.11. – 2024.02.24.

 

류다윤

 

한국의 추상조각을 대표하는 박석원의 다양한 물성의 탑들이 제각각의 높이로 전시장을 지키는 장승처럼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전시는 1980년대 전후 박석원의 ‘적의’ 연작을 중심으로 현재까지의 조각뿐만 아니라 평면 작업까지 보여준다. 그는 초기에 ‘초토(焦土)’, ‘적(積)’을 거쳐 ‘적의(積意)’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이어갔다. 유년 시절 외로울 때마다 동네 뒷산의 개울가를 찾은 그는 흙으로 형상을 빚고, 돌과 나무 조각을 가지고 쌓기도 하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조각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평생 자연을 스승 삼아 자연의 몸짓과 자연의 본성이 지닌 물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그의 작품 세계도 자연스럽게 변모해 왔다. 60여년간의 작업을 하면서 그는 ‘자르기’와 ‘쌓기’라는 작업 방식을 통해 조각에 새로운 조형적 가치를 부여하고 조각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절단과 축적의 반복

‘적의’는 ‘積(쌓을 적)’, ‘意(뜻 의)’라는 뜻으로, 돌이나 나무를 절단하여 쌓아 올리는 행위로 작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미학이라고 언급한 박석원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전통적인 조각 양식에서 벗어나 ‘자르기’와 ‘쌓기’라는 행위를 통해 재료 그 자체의 물성에 주목하여 새로운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길을 열었다. 단순한 형태의 조각은 이전의 조각에서 볼 수 있었던 재현적 요소를 차단하고 재료 본연의 특성과 구조를 강조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한다. 그는 “‘쌓음’은 우리네 삶에서도 마찬가지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철학대로 살아가는 매일의 삶이 계속 축적돼야 잖아요.“라고 언급하며 자신만의 예술적 가치관과 살면서 깨달은 삶의 철학을 동일시 했다.

 

박석원, <박석원: 비유비공 > 전시 전경, 2024

 

인간과 자연의 관계미학

각기 다른 물성으로 조각을 비슷한 형태로 반복해서 나열하는 태도는 도널드 저드의 ‘특정한 오브제(specific object)’를 떠올리게 만든다. 저드는 전통적 조각의 상징이었던 좌대를 없애고 산업재료를 이용해 단순한 형태를 무의미하게 반복함으로써 모더니즘에 남아있던 시각적 환영(illusion)과 사각형 캔버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저드가 어떠한 연상 작용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그 자체의 즉물적인 ‘특수한 물체’를 기계적인 방식으로 실현했다면, 박석원은 형태나 색감적으로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즉 기계적이지 않은 자연 상태의 객체들이자 돌들을 단조로운 형태로 반복적으로 배치한다. 이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저드와는 다른 층위의 차이와 통일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 완벽히 똑같지 않은 형태의 돌들은 위로 점차 중첩되고 쌓이고 때로는 결합하면서 새로운 변증법적 조각으로 탄생했다. 닮은 듯 다른 돌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통일감 속에서 잔잔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박석원, <적의-14037-중력>, 2014

 

전시장 한쪽 방 안에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돌들이 동그란 원을 이루는 <중력>이 있다. 돌이라 함은 본디 무겁고 그 자리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고정되어 있어 이동이 쉽지 않은 특성이 있다. 하지만 전시장 안에서의 <중력>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력’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 돌들이 바닥에서 엉덩이를 떼고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오뚝이처럼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돌들, 생동성을 부여받아 민들레 홀씨처럼 쉽게 흩어질 듯 가벼워 보이는 돌들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다. 이처럼 박석원은 자연을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한 생동하는 물질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돌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돌 아랫면을 둥글게 굴리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게 했다. 무생물인 돌에게 생동감과 역동성을 부여한 것은 어쩌면 근대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입체에서 평면으로

그는 한국 돌탑이 지닌 조형적 특성을 한국 추상조각을 넘어 한지라는 소재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전시장의 하얀 벽면을 채운 다소 단조로운 톤의 대형 캔버스에서 단순한 반복의 연속을 볼 수 있다. 일정하게 찢어 엷게 펴낸 한지와 캔버스는 한 몸을 이루어 기하학적인 형상을 보여준다. 한지는 한국 전통 방식으로 제조한 닥나무로 만든 종이로, 원래 갈라진 캔버스를 정면에서 고정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지가 캔버스에 자연스럽게 재료로 녹아들었다. 자르고 쌓기의 개념은 반복적으로 절단된 한지를 수평과 수직으로 중첩한 평면으로 확장되며 한자 그 자체로 물성이 강조된다. 이는 재료를 절단하고 쌓음으로써 재료의 물성을 강조하는 그의 조각적 태도의 연장선이며, 물질의 입체성이 평면성으로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색과 형태를 반복과 교차시킴으로써 한지 특유의 투명성에 더해 깊이감과 밀도 있는 축적이 발생한다.

 

박석원, <적의-23058 >,<적의-1839>, 2023 

박석원, <적의-2326 >,<적의-2328>, 2023 

 

한국의 석탑에서 돌의 물성은 물론 나아가 한국적인 색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며 박석원은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과 해석을 통해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단순한 형태의 반복과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형식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서구에서는 산업재료와 같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기계적 재료를 가져와서 작업을 했다면, 박석원은 전통 조각에서 사용하는 전통 재료인 철과 나무, 돌 등을 자연으로부터 그대로 가져와 최대한 그 재료만의 본성을 살려 자신만의 한국적 미니멀리즘으로 재탄생했다. 사물에 담겨 있는 특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단순한 반복을 추가해 재현이라는 전통 조각에서 탈피시키려는 시도는 자연을 고유한 존재로 인정하면서 인간과 자연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조화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조각적 태도이자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