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선 너머의 ‘폴리’들  

정서연(미술비평가)

계속해서 상호 충돌하는 점, 선, 면의 체계가 있다. 상호 독립적이면서도 중첩된 이 체계는 계속해서 변형되며 해체된다.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 1944-)가 라 빌레트 공원(Parc de la Villette)을 설계하면서 제시한 폴리(Folie) 개념이 그것이다. ‘폴리’는 불어로 광기와 정신착란, 비이성과 불합리, 무절제, 작은 별장 등 여러 뜻을 갖는 단어로, 추미는 이 단어를 라 빌레트 공원의 단위 구조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 ‘폴리’ 개념을 전시장에 구현한 《가시선 너머(Beyond Line of Sight)》 (2023. 3. 25. ~ 4. 2.)는 건축, 예술, 공학의 접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시기적절하다. 전시에 참여한 강정윤, 고경호, 김채린, 김휘아, 박정선, 박형조, 안예인, 이대철, 이서진, 이충현, 장준호, 정성진, 한윤제, 한지형(s.a.h), 건축전공 팀(양시현, 이채은, 최다빈)은 ‘폴리’의 혼성적이고 탈장르적인 개념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평면, 영상, 설치, VR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르면서 예술과 건축의 경계를 해체하고 관람자를 ‘가시선 너머’로 이끈다.

 

이서진, <LINK: >, 단채널영상, 3분 30초, VR, Filament, 가변설치, 2022.  

건축에서 ‘가시선(Sight Line)’은 무대 설계 시 무대와 관객의 시선을 연결하는 선을 뜻한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시야의 높낮이를 계획할 때 쓰이는 개념이다. 재현 가능한 영역에 가시선이 존재한다면, 재현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며 숨겨져 있는 것들은 우리의 ‘가시선 너머’에 있다. 가령 이서진의 <LINK: >를 보면 돌로 뒤덮인 산을 가상의 공간에 그대로 재현하여 가시선 너머의 세계를 구현한다. 삼중의 모니터를 통해 표현된 돌산의 모습은 사이-공간을 은유하면서 중첩된다.

중첩은 영상을 겹쳐 찍는 이중인화를 의미하는 불어 ‘surimpression’에서 온 것인데, 단지 사진이나 영상이 겹쳐져 있다는 의미보다는 고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라 빌레트 공원에 빨간 철골 구조물로 존재하는 추미의 ‘폴리’들이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고 용도가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처럼, 《가시선 너머》의 작품들은 고정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부유한다.

 

김휘아, <Crack>, Dimensions Variable, VR, Stainless, Chain, Bell, Chair, 2023.

김휘아의 <Crack>은 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공간과 결합하거나 대체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 작품은 VR을 이용한 인터랙티브 설치로, 관람객은 사각 구조물 아래 달린 VR 기기를 통해 가상공간에 접속한다. 가상공간에서는 손을 이용해 공간 속 대상들을 감각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상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가상공간 속에서 작품과 인터랙션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사각 구조물에 연결된 체인을 터치하게 된다. 체인이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는 현실의 파편들처럼 다가오며, 현실과 가상의 중첩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언제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유동적인 공간에 잠시 머물게 된다.

물론 전통적인 시공간의 개념 안에서는 유동적인 공간을 상상하기 어렵다. 공간은 점, 선, 면에 의해 위치화된 것으로, 정박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재하는 많은 공간들은 수시로 값이 변화하는 특성을 지닌다. 라 빌레트 공원의 ‘폴리’들이 식당으로 이용되었다가 야외극장으로 변모하는 것처럼, 공간들은 점, 선, 면을 잇는 매개로 기능하면서 유기적으로 존재한다.

 

 한지형(s.a.h), <Black Sheep Wall>, 복합매체, 105×80×180cm, 2022.

한지형(s.a.h)의 <Black Sheep Wall>은 점, 선, 면의 세 가지 구조에서 시작하여 여러 공간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전시장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폴리’로 존재한다. 작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영상 속에는 3D 스캐닝 공간을 헤매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디지털 표면에 부착되었어야 하는 스캐닝된 숲 속 공간은 현실 공간으로 옮겨져 유실된 맵을 찾으려는 시도가 좌절된다. 한지형(s.a.h)은 이 작품을 통해 디지털적 레이어가 중첩된 시선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시선에서 발생하는 오류와 단차를 가시화한다. 관람객은 레이어가 중첩되면서 펼쳐지는 예상치 못한 풍경들을 통해 해체적이고 모호한 공간을 감각하게 된다.

 

《가시선 너머》 전시 전경 (상업화랑 을지로)

추미의 ‘폴리’들이 가변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구조물이 공간을 그리드 형태로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선 너머》는 그리드의 좌표를 표현하기 위해 ‘상업화랑’이라는 공간을 활용했는데, 을지로와 용산 두 곳에 전시장을 마련한 것은 그리드를 이루는 점을 구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상업화랑은 머릿속에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의미와 달리 ‘서로 상(相)’ 자의 의미대로 상생적 의미와 사회적 역할에 주목한 대안적 전시공간이다.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명명과 상징적인 지리는 《가시선 너머》의 공간을 새롭게 구축한다.

 

김채린, <세이브 미>, 단채널영상, 혼합재료, 5분 12초, 27인치(60×38cm), 2022.

상업화랑 을지로에 전시된 김채린의 영상 작품 <세이브 미>는 그 자체로 경계 없는 이동성을 보여준다. 영상은 작가의 완성된 작품들이 의도치 않은 공간에 놓인 모습을 클로즈업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불연속성과 불안정성을 극대화하면서 이질성을 드러내는 전략을 취한다. 예상치 못한 곳에 놓인 조각들은 비일상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이렇게 분열되고 파편화된 이미지는 추미의 해체적인 전략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작품이 놓인 곳뿐만 아니라 때때로 놓이지 않은 곳을 비춤으로써 일탈한 상황을 공간에 끌어들이고, 이때의 공간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제3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강정윤, <시선의 연속 III>, 수집한 CCTV 사진 패브릭에 출력, LED, 100×10×100cm, 2021.

한편,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폴리의 체계는 각각 상호독립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만, 전체에 통합되는 구조를 가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체적인 통일성을 거부하면서 언제든지 분리되고 결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강정윤의 <시선의 연속 III>은 전체와 부분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힌다. QR코드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은 현대 도시의 다층적인 구조들을 부분과 전체에서 각각 조망한다. 언제든지 다른 부분들과 결합하거나 대체될 수 있는 ‘폴리’처럼, 강정윤의 시선 속 도시의 장면들은 불연속적이고 산발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대철, <oh>, 154×45×195cm, color on pvc, steel, 2022.

마지막으로 이대철의 <oh>는 보다 직접적으로 불완전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본래 언어라는 것은 의미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것이 시각적으로 표현되었을 때는 고정적이고 완전한 인상을 준다. 추미가 광기와 정신착란의 뜻을 지니는 ‘폴리’를 건축적 요소에 도입한 이유는 전통적인 건축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극단적인 것과 금지된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대철은 그동안 언어의 영역에서 제외시켰던 예상 밖의 것을 <oh>를 통해 실행하면서 불완전한 언어의 요소들을 가시화한다.

 

베르나르 추미는 “각 부분은 다른 부분의 원인이 되며, 모든 구조는 불안정하고 다른 구조의 흔적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다. 《가시선 너머》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폴리’들은 분열된 단편들인 동시에 예측이 불가능한 새로운 조합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다른 것들로 전이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시선 너머의 ‘폴리’들은 상호보충적이면서도 상호배타적으로 존재하면서 예상치 못한 제3의 관계들을 창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