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광, <매스의 내면>, 1985
출처: 가나아트센터 홈페이지

 

면과 덩어리, 제3의 공간

안소연(미술비평가)

한 조각가

1979년 가을, 조각가 전국광(1945-1990)의 첫 개인전이 열린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는 나무, 돌, 청동 등을 재료로 ‘평판의 구축’을 한껏 과시하는 형태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됐다. 전시를 계획하며 그 해 여름쯤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작가의 메모와 전시 카탈로그, 그리고 그때의 전시장 모습을 기록한 몇 장의 사진들로 40여 년 전 한 젊은 조각가가 있었을 그 전시장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전국광은 1972년 ‘에스프리(ESPRIT)’ 결성 후, 동인전을 시작으로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조각의 재료와 형태를 둘러싼 당대의 현대적 논의에 주목하며 자신의 작업을 점차 확장해 갔다. 홍익대학교 조소과 재학 시절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출품해 여러 차례 입상을 했고, 주로 당대의 청년작가들을 아우르며 실험적인 현대조각의 양상을 소개한 주요 전시들에 빈번히 참여했던 전국광은 그로부터 약 10년 만에 자신의 첫 개인전을 연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첫 개인전에서, 조형적 실험을 지속해 온 일련의 <적(積)> 시리즈를 통해 형태의 다양한 변용을 시도했다.

   첫 개인전 이후, 전국광은 30회 국전에서 <매스의 비>(1981)로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젊은 조각가로서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그는 그 무렵 <적> 시리즈로 일컬어지는 초기 작업을 기반으로 한 <매스의 내면> 시리즈에 집중하면서 조각에 대한 개념적 접근에까지 이르렀다. 예컨대 <적> 시리즈에서는 평면의 반복적 구축을 통한 유기적이고 역학적인 구조를 부각시켰다면, <매스의 내면>에서는 실존하는 형태로서의 ‘매스’ 자체에 주목해 그것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조형적으로 탐색해 보려는 사유의 과정을 드러냈다. 주로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 화단에 일었던 비물질화 경향과 개념적 예술 실천을 환기시키는 <매스의 내면> 연작은, 조각의 행위와 실존적인 형태로서의 매스를 작업의 논리 안에서 직결시킨다. 이때 그가 말하는 ‘매스’, 즉 외피를 가진 덩어리는 완전한 형태라기 보다는 조형적 조건으로서의 현전을 강조한다. 또한 전국광이 40대의 조각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 1980년대 중후반의 작업을 보면, 네 번째 개인전 《매스의 내면-0.419㎥의 물상》(1986, 교토 마로니에 화랑)에서처럼 비물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차츰 공간과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늘 되뇌며 모색했던 조각가의 임무는, 여기서 0.419㎥라는 수치상의 용적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매스의 내면을 낱낱의 물상으로 구체화 하여 실현시키는 데에 있었다.

   이렇듯 조각가로서 그가 살아가던 시대의 현상을 감지하며 나름의 조형적 탐구에 몰두했던 전국광은 사고로 46세에 죽음을 맞이해, 사실상 국전에 입상한 1969년부터 생을 마친 1990년에 이르는 약 20년 동안의 작업을 그의 부재 가운데 회고해야 하기에 아쉬움이 크다. 이 글에서는 조각가 전국광의 작업 전반을 살피면서 특히 그가 조각의 조형언어를 통해 깊이 사유해왔던 ‘표면’, ‘덩어리’, ‘공간’에 더욱 주목해 보려 한다. 한국 현대조각의 흐름 속에서 1970~1980년대를 거쳐 간 한 사람의 조각가와 깊이 대면하는 것은, 그들 시대의 새로운 미적 성취와 정신적 연대를 개별적으로 살핌으로써 보다 가까이에서 구체적으로 가늠해 보는 일이기도 하다.

전국광, <매스의 내면>, 1983
출처: 가나아트센터 홈페이지

 

적(積), 평면의 유기적 구조

전국광의 초기작업으로 분류되는 <적(積)> 시리즈는 외관상 동일한 면들이 차곡차곡 쌓여 반복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는 일련의 연작을 통해, 쌓아 올린 평판들의 구조적 관계와 그에 따른 물리적 변화를 표현했다. 이를 반영하듯 작품 제목에는 대부분 부제가 따라 붙는데, 이를테면 <적-변이Ⅰ>(1977), <적-직각변이>(1977), <적-비약>(1978), <적-상승>(1979>처럼 각각의 단어들은 형태의 역학적 구조를 상세히 함의하고 있다.

   그 중에서 1977년 ‘공간미술대상’을 수상(조각부문/우수)한 <적-변이Ⅰ>을 보면, 얇은 판형을 수직으로 야트막하게 쌓아 올린 구조인데 반복적으로 구축된 동일한 평판이 어떤 물리적 역학에 의해 변형되어 표면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일반적으로 구조적인 측면에서 표면이 두드러지게 강조된 조각의 형태는 역설적이게도 보이지 않는 내부에 대한 의문을 더욱 가중시키게 마련이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부터 나란히 쌓아 올린 다섯 개의 면은 구축된 내부 공간의 한가운데서 발생한 “알 수 없는” 임의의 물리적 원인으로 인해 안으로부터 큰 변형이 이루어져 마치 파장을 일으키는 수면처럼 일렁이는 표면을 얻게 됐다. 언뜻 지층의 표면이나 수면 위를 연상시키는 이 형태는 스스로 그 내부에 보이지 않는 물리적 힘을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린다. 다섯 개의 평판은 중심으로부터 발생한 그 힘에 유기적으로 반응하여 변형된 채 미세한 형태의 차이를 그려내고 있다. 평판의 단순한 수직적 구축은 그것을 변형시키는 내부의 어떤 힘에 의한 또 다른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적”이라는 본래의 구조 위에 발생한 또 다른 물리적 힘의 정체이며, 적어도 전국광의 조각은 움직임을 함의한 형태로서의 존재방식을 강하게 표출해 놓았다.

   사실 석조로 된 <적-변이Ⅰ>은 하나의 덩어리에서 다섯 개의 평판이 차곡차곡 쌓인 형태의 윤곽을 깎아서 다듬어 낸 것이라, 면의 구축과 변형이라는 것은 그 조각의 형태가 개념상 함의하고 있는 조형적 논리에 따른다. 실제의 면들이 실제의 공간 속에 구축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물리적 현상과 변화의 양상을 단단히 고정시켜 작가가 재현한 것이다. 어떠한 면에서 이는 마치 20세기 초의 미래주의와 구축주의자들의 분석적 사고를 연상시키는데, 전국광의 <적> 시리즈는 형태의 “구조적이고 물질적인 본질”과 실재하는 역학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상대적인 존재방식”을 모두 아우른다. 예컨대 “적”과 “변이”가 한 쌍을 이루는 작품의 제목처럼 말이다. 이는 또한 대상에 대한 시각적 이해의 한계와 지각적 이해의 가능성 사이를 오가며 조각의 논리에 있어서 관념적인 인지에 의해 시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총체적인 사고를 요청한다. 전국광은 이처럼 ‘구축’의 논리로 만들어진 일련의 형태와 그에 대한 다양한 변용을 통해,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총제적 인식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적> 시리즈에서는 평면의 구축이 조각의 내부 공간을 총체적으로 지각 가능하게 하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면들의 구축이라는 조형 논리는 2차원의 면들을 구축해서 3차원의 입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조각의 표면으로부터 시작된 내부 공간에 대한 연속적인 지각이 도식적으로 전개된다. <적-균형Ⅱ>(1979)를 예로 들어 보자. 기본적인 골격을 보면, 동일한 크기의 긴 직사각형 평판 여섯 개가 모서리를 나란히 맞춰 수직으로 구축된 모양을 띠고 있다. 추가적으로 작용한 물리적 역학에 의해 가장 바닥에 있는 판이 둔각을 이루며 구부려져 있고, 그 중심각 안으로 모여드는 각각의 면들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따른 형태의 변화와 재배열의 순간을 하나의 통일된 윤곽선으로 재현한다. 때문에 <적> 시리즈가 표방하는 기하학적인 추상의 형태는, 표면에 드러난 각 면들의 유기적 구조를 통일된 논리 속에서 인지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조각의 내부를 완전한 윤곽선의 총체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형태의 외관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의심과 계속되는 질문은 조각에 있어서 매스의 리얼리티를 탐구하려는 핵심적인 동력으로 작용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털어놓았던 것처럼, 때때로 “흔한 감각의 오류”에 휘말리곤 하면서도 그는 “더 큰 면”과 “풍량한 매스”를 찾아내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적> 시리즈가 나름의 조형 논리를 구축해 갈 무렵, 전국광은 특히 조각의 “매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추측컨대, 그것은 판형의 구축을 통해 내부의 구조를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조각의 총체적 윤곽선에서 파생된 하나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나는 작업 구상을 메모해 놓은 그의 드로잉을 살펴보다가, 유독 그가 매우 정성들여 그린 두 개의 작업 에스키스에 주목했다. 구조는 <적> 시리즈와 비슷하게 넓은 판형을 네 다섯 개씩 쌓아 올린 모습이었는데, 가장 위에 놓인 면이 반으로 살짝 접힌 형태였고 잇따른 두 번째 면도 곧 젖혀질 기세로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은 1980년에 구상한 드로잉으로, 그가 곧 몰두하게 될 “매스”와 “매스의 내면”을 예견하는 중요한 사건처럼 눈길을 끌었다.    

 

매스, 실존하는 덩어리 

전국광은 1981년에 <매스의 비>로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대략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적> 시리즈로부터 확장된 조각의 “매스(mass)”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같은 해 교토 마로니에 갤러리에서 열린 2회 개인전은 “매스”와 “탈매스”라는 개념을 통해 소위 조각의 양감이 제시하는 리얼리티와 일루전의 효과를 조형적으로 연구했다. 이후 1983년부터 제작된 일련의 작품 연작 제목은 <매스의 내면>으로 엮여 일관되게 제시되곤 했는데, 이는 조각에 있어서 그가 규정한 “외피로서의 매스”와 그것을 이루는 “충분조건으로서 매스의 내면”을 탐색하는 시도였다. <적> 시리즈에서부터 비롯된 조각의 ‘표면’에 대한 탐구는 <매스의 내면>으로 이어져 점차 구체화되면서, 조각의 총체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는 외피의 본성에 대한 개념적인 논의로 심화되어 갔다. 다시 말해서, <적> 시리즈가 형태에 대한 총체적인 지각의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제시했다면, <매스의 내면> 시리즈는 지각의 방식을 넘어서서 형태의 외피, 즉 일련의 실존적인 매스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형상으로서의 재현 (불)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2회 개인전 리플렛에 실린 한 장의 흑백 사진에는 하단에 <매스와 탈매스 Mass and Massless>(1981)라는 작품 제목이 함께 표기돼 있다. 그것은 가로 1미터 길이의 추상적인 목조 작업이었는데, 육면체 덩어리의 3분의 1 정도가 그 표면이 매끄럽게 정리된 채 마치 식빵처럼 일정한 두께로 잘린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1980년의 에스키스 드로잉과 비슷하게 움직임을 내포한 형태였다. 어쩌면 임의의 한 덩어리에서 그 외피를 벗겨냈을 때 마주할 법한 이 미완의 부분적인 형태는, 전국광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외피로서의 매스에 대한 필연적 형상이 아닌 다만 그럴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으로서의 형상 다수를 대변한다. 때문에 <매스와 탈매스>는 말 그대로 매스와 매스로부터 벗어난 (내면의) 형상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구조를 드러낸다. 전국광은 <적> 시리즈에서부터 줄곧 지속해 온 표면 너머의 “보이지 않는 부분”, 이를테면 외피 안의 공간 속으로 잠겨버려 쉽게 규정할 수 없는 형상에 대해 상상케 하는 “실체”를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사물의 외피를 그 내면의 구조와 연관시킬 수 있는 조각의 고전적인 규범에 다가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는 작업을 통해 외피와 내부 구조의 총체적인 시각적 통합을 완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조각의 표면이 지닌 조건을 감각함으로써 우연히 감지되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내부의 힘을 시각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때문에 그것은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시사한다.

   이후 <매스의 내면> 시리즈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화강암이나 임의의 흙덩어리 등에서 기하학적 형상의 단위를 반복적으로 분해시켜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임의의 기본 조형 단위를 설정하여 그것으로 일정한 용적을 지닌 입체물을 구축해내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전국광은 화강암의 일종인 황등석을 재료로 하여 비슷한 형태의 <매스의 내면>을 여러 점 제작했다. 자연에서 얻은 돌덩어리에서 유기적인 형태의 생성 가능성을 모색한 작가는, 조형적 조건으로서의 외피를 지닌 하나의 덩어리가 그 내부에서 스스로 분열하여 새로운 형태를 구축해내는, 즉 외부 표면과 내적 구조의 상호 관계를 분석하여 제시했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구조적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입체적 윤곽을 띠고 있는 형태의 모든 단면/표면들이 내부 구조로 굴절될 때 실제의 공간에서 우연히 생성/분해되는 낯선 실체에 가깝다.

   사실 선재나 판재를 반복해서 구축하는 방식으로 입체적인 매스를 획득하는 작업도 경로의 방향만 다를 뿐 마찬가지다. 큰 육면체 기둥 모양을 띤 구조물이나, 천장에 매달아 놓는 구축물도 <매스의 내면> 시리즈로 제작됐다. 마치 개념상 2차원 평판의 구축이 일련의 <적> 연작에서 3차원의 매스를 확립했던 것과 같이, 여기서는 실제의 선과 면들이 실재하는 공간에서 일정한 용적을 차지하는 순수한 매스를 구축하면서 “현상으로서의 조각”을 크게 가시화한다. 이렇게 제시된 매스의 내면은 불확실하지만 희미한 매스의 윤곽을 특징짓는 충분조건이 된다. 그의 말대로, “동일한 조건이 어떤 현상에 부딪치며 이루어진 상황을 형상화시키며 생의 굴곡을 확인”하는 것이 전국광에게는 바로 조각이다.

   한편 작업을 위한 그의 드로잉은 매스와 매스의 내면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매스의 내면-선은 가능한가, ’87 선의 생일날에>(1987)나 <매스의 내면-Cosmic, Rounding…>(1987)처럼, 전국광은 동일한 조건으로서의 단위체들이 개별적인 물리적 현상들에 반응하며 일으키는 실존적인 상태를 “매스의 내면”으로 규정하고 이를 여러 방식으로 조명했다. <매스의 내면-선은 가능한가, ’87 선의 생일날에>를 예로 들어 보자. 긴 선들의 집합체를 가운데만 잘록하게 묶어 놓은 듯한 형태다. 전국광은 동일한 조건(크기, 양, 부피 등)의 사물을 모아 놓고 가운데 부분에 힘을 가해, 결과적으로 중심부로부터 양쪽 가장자리에 퍼져나가는 형태의 변화를 꾀했다. 드로잉으로 제시된 형태는, 동일한 조건들이 각기 다른 외피의 조건 아래 구속되었을 때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는 매스의 내면을 구조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매스의 내면-Cosmic, Rounding…>에서도 원의 중심에 집중된 힘과 원의 둘레로 퍼져나가는 힘은 동일한 조건의 사물을 전혀 다른 공간 속에서 다른 형태로 경험하게 한다. “매스의 내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또 다른 드로잉에서도 그의 일관된 실험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쇠뇌작용Ⅷ-수평적 사고로…>(1989>는 동일한 단위로서의 원형이 어떻게 또는 얼마만큼 수평이동을 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외피로서의 매스를 구축해 나갈 변형 가능성에 대해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공간, 0.419㎥에 대한 사유 

전국광은 애초에 “자신의 미의식을 동원해 어떠한 형태를 구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작업 메모를 찾아보면, 스스로 “연출가적인 입장에서 구상”하며 이로써 “확실한 리얼리티에 접근해 보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부터 살펴본 바와 같이, “현상”, “상황”, “연출” 등 그가 작업의 맥락을 설명하는데 줄곧 사용해 온 단어들은 완결된 형태로서의 결과물을 염두에 두기 보다는 임의의 조건들 속에서 형태가 구축 혹은 분해되는 과정을 적시하고 있다. 특히 1986년 일본에서 열렸던 그의 네 번째 개인전 《매스의 내면-0.419㎥의 물상》은, 형태의 리얼리티에 접근하기 위해 어떤 상황으로서의 조건을 각각 연출함으로써 “현상으로서의 조각”을 재차 강조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한 조각가의 미의식이 투영된 자율적이고 완결된 형태를 구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실제 상황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형태 스스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했다.

   실존하는 매스의 내면을 탐구했던 전국광은 자신의 개인전에 “0.419㎥의 물상”이라는 전시의 부제를 달고 각기 다른 물질들(흙-테라코타, 종이, 나무, 노끈, 섬유 등)이 동일한 용적을 차지하는 방식들에 개별적으로 다가갔다. 그의 조형적 탐구 안에서, 0.419㎥라는 수치상의 용적은 분명 임의의 존재에 대한 폐쇄적 조건으로서의 한계이자 임의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무한한 범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시는 매스와 매스의 내면이 공존하는 물리적 실체에 대한 규명이었다. 이에 전국광은 매스의 내면을 환기시키는 0.419㎥의 용적에 각기 다른 물질들로 구축된 형태의 윤곽, 즉 외피로서의 매스가 반응하도록 이끌었다. 0.419㎥의 용적은 추상적인 존재에 불과하지만, 추상적인 매스의 내면은 그것을 감쌀 수 있는 외피와 결합하는 순간 실존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제3의 공간 형성”이라고 메모해 둔 전국광의 드로잉을 떠올려 본다. 그는 선과 선을 연결해 새로운 면을 만들고 면과 면을 굴절시켜 새로운 공간을 형성하는 단순한 조형 원리에 따라 “제3의 공간”을 확보했다. 제3의 공간은 0.419㎥의 물상처럼 단단한 외피와 우연히 결합했을 때 비로소 살아 남겨진 매스의 내면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0.419㎥에 대한 사유는 자립할 수 없는 불완전한 형상들에 대한 일종의 실존 가능성을 탐구한다. 전국광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적> 시리즈를 통해 보이지 않는 조각의 내부 공간을 개념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형태에 대한 투명한 지각 방식을 도모한 바 있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매스의 내면> 시리즈에서 일정한 용적을 지닌 낱낱의 물상과 그것의 무한한 변형 가능성을 동시에 모색했었다.

   이제, 그를 회고하는 이번 전시의 제목 또한 《0.419㎥의 물상》이다.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하는 <자유-나와 너희들 그리고 나들>(1989)을 보면, 전국광은 비슷한 용적을 적용한 듯 보이는 세 개의 뾰족한 기둥을 각기 다른 재료들로 만들어 한정된 공간 안에 배열했다. 그는 여기서도 개별적인 물상의 자유분방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짧았지만 조각가로서 그의 생 전반에 걸쳐 “적”과 “매스”에 대해 깊이 사유했던 예술적 태도와 실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이 글은 전국광 개인전 [ 0.419㎥의 물상] (가나아트센터, 2018.3.13-4.8) 서문으로 전시 도록에 발표된 것을 필자가 제공하여 재게재한 것입니다.

 

안소연 (미술비평가)
안소연은 미술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언어를 통한 이미지 사유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왔다. 최근에는 비평의 언어와 글쓰기 행위를 통해 예술적 삶의 가치와 실천의 방법을 찾고 있으며, 창작으로서 비평적 협업의 방법들을 실험하고 있다. 비평적 말하기 활동으로 “인터뷰 프로젝트-우리 시대의 예술가”(스페이스윌링앤딜링, 2021)를 기획하여 진행했으며, 조각에 대한 동시대적 변화의 조건과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한국 동시대 조각의 매체 조건과 수행성의 변화”(예술과 미디어 학회, 202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