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속에서 언어 포착하기

최준원 개인전ㅣ2023.08.20~2023.09.15

 

   류다윤

 

우리는 평소에 수많은 언어와 기호들을 접하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가만히 앉아서 책이나 기사 통해 글을 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표지판의 문구들을 빠르게 스치듯이 마주하기도 한다. 이때 글자는 해당 공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 속도감으로 인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지나간 자리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각적 잔상 효과를 포착할 수 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포착이 필요한 언어나 상징은 색으로써 우리에게 의미를 순간적으로 전달하는 신호등과 기호로써 위험성과 방향성을 알려주는 표지판의 모습과 닮아있다. 최준원 작업에 있어서 언어는 하나의 이미지-언어가 된다. 그는 특히 가상 세계나 게임 속 장면에서 떠도는 단어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는데, 여기서 언어나 부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전달하는 미디어이자 매체의 개념을 넘어서 글자 자체가 조각으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가상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신호 언어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통 언어이다. 미리 프로그래밍 되어 사용자에게 신호를 주는 전자의 신호 언어는 게임 사용자가 게임을 하거나 중간에 원활한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후자의 언어와는 차이가 있지만, 이들 모두는 순간 속에서 존재하는 이미지이자 언어들인 것과 온라인이나 가상 공간에 존재하는 단어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문자들이 서로 다른 크기, 모양과 색깔을 가지고 사라지고 생기기를 반복하면서 우리에게 이미지로써 다가온다.

 

디자인 작업에서 2차원의 타이포그래피가 있다면, 최준원의 작업은 이것을 3차원으로 변환시킨 타이포그래피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평면의 비물질성을 가진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언어를 사용하거나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하는 ‘기의’를 사용하지 않는다. 즉, 글자의 뜻을 강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단어의 의미에 집중하지도 않고 심지어 단번에 파악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알 수 없는 상징과 기호들로 가득 채워진 모니터나 가상 공간 속의 단어들을 오히려 현실로 끌어내고자 시도한다.

 

최준원, <그만 이 싸움을 끝내자>, 2023. (출처: 작가 제공)

 

관람자가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면 한 가운데서 시선을 사로잡는 <그만 이 싸움을 끝내자>를 마주하게 된다. 총 5개의 검은색 화살표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상 방향을 나타내는 화살표는 한 방향을 지시하기 마련이지만 그의 화살표는 오른쪽도, 왼쪽도 아닌 어느 방향을 지시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이 이미지-언어는 방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신호 언어이지만 동시에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신호로서의 기능을 잃은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붉은색의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반적인 화살표와 달리 그의 화살표의 색상은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으로 채워져 있어 신호로서의 기능을 한층 더 잃도록 유도한다. 더 나아가 제목에서도 암시하듯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양 끝의 화살표는 이 싸움을 끝내고 서로의 길을 가려 한다는 점에서 방향성을 완전히 잃고 방황하게 만든다.

 

최준원, <혹시 시간이 없더라도 반드시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2023. (출처: 작가 제공)

 

<혹시 시간이 없더라도 반드시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에서는 작품 제목에서부터 흥미로운 모순을 경험할 수 있다. ‘혹시’라는 단어는 강요가 아닌 제안, 즉 듣는 이로 하여금 선택이 가능하도록 선택권 부여하는 권유의 성격을 지닌다면, ‘반드시’는 강제성을 가지고 꼭 해야 하는 임무나 과제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 공존하기 어려운 두 단어가 한 문장에 쓰인 것은 앞서 언급한 <그만 이 싸움을 끝내자>처럼 어떤 방향 또는 의미를 작가가 관람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다시금 질문을 곰곰이 되풀이하게 만든다. 또한 느낌표를 사용하여 물음표 없는 물음을 통해 의미의 모호함을 증폭시킨다. 게임 속에 등장할 법한 이 거대한 느낌표 주변에 있는 말풍선은 오랜 시간이 지나 마모되거나 갈라진 형상을 통해 이러한 문장 부호의 숨은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최준원, <10. 와;;;딜좀보소;>, 2022. (출처: 작가 제공)

 

전시장 우측 벽면에 글자인지 이미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되지 않는 빛 바랜듯한 형광 빛의 작품이 하나 있다. <와;;; 달좀보소;>는 게임 속에서 해당 단계를 클리어 했을 때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숫자를 표현했다. 게임을 하면 그 순간에만 사용자가 발견할 수 있는 단어로,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들을 수 없는 구전동화같이 순간성을 지닌 ‘말하는(spoken)’ 언어이자 신호 언어이다. 일시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 신호 언어는 온라인상에서는 분명하고 완전하면서 영원할 것처럼 존재하지만 이내 사라진다. 또한 녹슬고 오랜 시간 방치되어 광택감을 잃은 질감 표현을 통해 모니터 속에서 살아 있던 언어가 현실로 빠져나오면서 생기를 잃은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상처 입고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언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2D의 평면적 형태를 넘어 3D의 입체적인 작품이 되었다. 온라인상에서 수많은 문자와 기호는 서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이 생명력 없는 글자에 양감과 무게감을 더해주고 더 나아가 다양한 질감 표현, 부분적으로 광택이 없앤 작업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영원불멸할 것 같지만 오히려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쓰는(written)’ 언어가 아닌 ‘말하는(spoken)’ 언어의 순간성을 닮아있는 조각이다. 그의 언어는 더 이상 가상적이거나 환영적 존재로서의 머물러 있지 않고 모니터 밖을 나와 자유로이 부유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를 형상화한 작업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언어와 기호들로 가득찬 가상 세계에서 단어의 순간을 포착하고 해방시키고자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