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구엘 슈발리에의 디지털 자연

정서연(미술비평가)

미디어 아티스트 미구엘 슈발리에(Miguel Chevalier, 1959-)의 <엑스트라-내추럴>에는 기존의 식물 분류에서 벗어난 다양한 상상의 식물이 등장한다. 선명한 색상을 띤 발광형 식물, 반투명 잎을 가진 허브, 이국적인 화관을 지닌 꽃들이 모여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정원을 구성한다. ‘인공 정원’으로도 불리는 이 작품을 통해 슈발리에는 가상과 실재의 경계에서 자연을 재창조한다.

미구엘 슈발리에, <엑스트라-내추럴(EXTRA-NATURAL)>, 2023. (출처: 작가 홈페이지)

슈발리에의 <엑스트라-내추럴>은 인공 생명체를 생성하는 알고리즘을 활용해 식물의 성장과 증식, 소멸을 순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유전적 특성이 부여된 가상의 식물들이 각자의 고유한 주기에 따라 진화를 거듭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꽃받침과 함께 꽃술을 감싸고 있는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고, 수술이 폭발하기도 하며, 잎은 비처럼 내린다. 무작위로 나타나는 비정형의 꽃들은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며 생명의 소우주를 담아낸다.

멕시코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슈발리에는 1970년대 후반부터 가상적인 움직임을 작품에 구현하는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고 있다. 대규모로 투사되는 디지털 설치 형태의 작품을 주로 제작하며, 특히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패턴이 변화하는 작품을 통해 장소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해석을 부여한다.

슈발리에의 작품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 많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오늘날 자연과 인공물이 공존하며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관계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가령 앞서 살펴본 <엑스트라-내추럴>은 ‘꽃’에 대한 사유를 은유적으로 탐구하는 작품이다. 슈발리에에 따르면, 꽃은 언제나 우리를 매료시키는 대상으로, 종교, 신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꽃의 문화사에 주목하면서 이를 생생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미구엘 슈발리에, <프랙탈 플라워(Fractal Flower)>, 2023. (출처: 작가 홈페이지)

슈발리에의 <프랙탈 플라워> 또한 가상의 식물을 은유한 작품이다. 작가는 90년대 말부터 현실 속 식물계를 관찰하면서 여기에 상상력을 가미해 가상의 씨앗을 만들어왔는데, 이 작품에서는 식물, 광물, 동물, 로봇이라는 네 가지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새롭게 자라난 생명체를 표현한다. 현재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디지털 뷰티》 (2023.1.18. ~ 2024.2.11.)에는 3D 프린팅으로 제작한 8종의 가상의 프랙탈 플라워를 살펴볼 수 있다. 디지털 발아로 탄생한 이 가상의 꽃들은 피고 지는 무한한 변화를 반복하며, 우리를 인공 낙원으로 이끈다. 슈발리에는 자연을 모사한 이러한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인공 시대 자연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자연이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작가는 인공 낙원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는 조건을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미구엘 슈발리에, <트랜스-네이처(TRANS-NATURES)>, 2020. (출처: 작가 홈페이지)

슈발리에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트랜스 네이처> 또한 자연과 인공물 사이의 연결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덤불 속 식물을 연상시키는 이 디지털 작품에 대해 뿌리와 가지의 원리를 추적하는 ‘수목학’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다. 느슨한 식물의 형태는 곡선을 그리며 공간으로 뻗어나가고, 날카로운 가지는 화면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 보인다. 슈발리에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 덤불, 나뭇가지, 나뭇잎의 이미지를 결합해 이들은 무작위로 나타나도록 프로그래밍함으로써 끊임없는 생성을 표현한다. 서로 얽히고설킨 덤불들이 자유 낙하하며 소용돌이치는 모습은 마치 식물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생물 다양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면서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담아낸다.

 

미구엘 슈발리에, <DIGITAL ABYSSES>, 2021. (출처: 작가 홈페이지)

슈발리에의 관심은 비단 육지식물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쿠아플라넷 제주에서 열린 《디지털 심연 제주의 바다를 색칠하다》 (2021.11.8. ~ 2022.11.6.)에서는 제주라는 지역에 걸맞게 가상의 해저 동식물을 만들어냈다. 해초류, 산호, 해파리, 동물 플랑크톤 같은 실제의 바다 생물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가상의 수중 초원을 구현한 것이다. 3개의 가상 물방울로 구성된 ‘디지털 플랑크톤’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진동(Oscillations)>과 같은 작품에서는 사운드를 결합해 바다를 다성 음악으로 나타냈다. 이처럼 슈발리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생명체와 보이지 않는 생명체를 동시에 다루면서 인공 생명체의 개념을 탐구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생 관계를 위한 조건을 탐색한다.

 

미구엘 슈발리에, <세상의 기원(THE ORIGIN OF THE WORLD)>, 2013. (출처: 작가 홈페이지)

슈발리에는 그동안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서 차용한 컴퓨터 모델을 활용해 하이브리드 형태의 다채로운 예술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여 왔다. <세상의 기원> 역시 생물학과 미생물의 세계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세포가 분열하고 증식하는 모습이 독특한 패턴으로 그려진다. 세포는 자율적으로 움직이지만, 다른 세포와 협력하여 작동한다. 관람객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세포들이 쪽이나 오른쪽으로 흐트러지기도 한다. 세포들은 이처럼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우주를 구성하며, 자연의 시뮬라크르는 우리를 인공 낙원으로 인도한다.

슈발리에는 <세상의 기원>이 디에로 리베라(Diego Rivera)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와 같은 멕시코의 벽화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슈발리에는 자연을 영감 삼아 만든 작품 외에도 다양한 문화적 패턴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멕시코 전통 가옥의 바닥과 벽에서 보던 복잡한 패턴에 매료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는 특히 기하학적 모양의 ‘아라베스크’를 작품의 도상으로 자주 활용하곤 한다. 아라베스크는 아랍인이 창안한 장식 무늬로, 식물의 줄기와 잎을 도안화하여 기하학 무늬와 조화를 이룬 것이다.

 

미구엘 슈발리에, <디지털 아라베스크(Digital Arabesques)>, 2014. (출처: 작가 홈페이지)

2014년 선보인 <디지털 아라베스크>는 전통적인 아라베스크의 복잡한 패턴이 화려한 색상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마슈라비아(Mashrabiya)’라는 이슬람 특유의 격자무늬를 활용한 디지털 패턴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매혹적인 움직임과 유동성을 만들어낸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아라베스크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제안한다. 과거의 전통을 현대의 디지털 기술과 융합하여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를 만든 것이다. 이 작품은 전시장이 아닌 완전히 개방된 장소에 설치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야외의 환경에서 주변의 문화적 요소들과 어우러지며 관람객과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해당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미구엘 슈발리에, <매직 카펫(Magic Carpets>, 2014. (출처: 작가 홈페이지)

슈발리에가 활용한 문화적 패턴은 팔각형의 건축 양식이 돋보이는 몬테성(Castel del Monte)에서 다시 한 번 구현됐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 몬테성은 수학적, 척문학적 엄밀함이 깃든 건축물로, 슈발리에가 만들어낸 수천 개의 디지털 모티브와 기하학적 패턴이 표현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유기적인 세계는 사각형 지구에서 원형 하늘로 전환되는 모습을 담아내면서 인공적인 우주가 삶의 우주와 합쳐지는 순간을 표현했다. 슈발리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프로젝션 맵핑 기술을 활용해 현대 문화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반영하는 패턴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창조해낸다.

 

미구엘 슈발리에, <Dear World…Yours, Cambridge>, 2015. (출처: 작가 홈페이지)

이처럼 자연과 문화를 연속체적인 개념으로 보는 슈발리에의 시각은 2015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성당 내부를 디지털 아트로 수놓은 작품으로 구현됐다. 이곳 킹스 칼리지 채플은 수세기에 걸쳐 유명한 석학들을 배출한 학문의 성지라는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 슈발리에는 이를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의학, 생물학, 신경과학, 물리학, 생명공학 등을 모티브로 실시간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은 천재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에 대한 ‘오마주’로도 읽힌다. 호킹의 블랙홀에 대한 연구를 설명하기 위해 수천 개의 별자리로 구성된 몰입형 환경을 상상해 우주의 신비로움을 담아낸 것이다. 16세기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예배당과 디지털 설치에서 나오는 빛이 어우러져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미구엘 슈발리에는 전통적인 예술 기법과 현대의 기술을 결합하여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도전하는 상호작용형 미디어 아트 작품을 제작해 왔다. 그가 만든 작품들은 과거와 현재, 가상과 현실, 자연과 인공 등 다양한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경험과 인식을 제공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예술적 표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디지털화되면서 예술적 표현의 잠재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 슈발리에의 작품은 기술을 활용한 문화적 경험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점에서 예술의 미래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