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 미 Save me》 전시 전경, GS칼텍스 예울마루 장도전시실, 2022 

 

사물과 조각 사이, 기능하는 조각 또는 안무적 조각
[김채린 개인전: 세이브 미 Save Me]

안소연(미술비평가)

1. 조각적 감각

받침대 위에서 정지된 채 정면의 윤곽선을 확고히 하며 그 어떤 시공간의 중력도 거부하고 자율적으로 수직성을 지켜내던 고전적인 조각 규범에 비추어 보면, 김채린의 조각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현대 조각의 다양한 수사를 그늘막 삼아 조각에 대한 동시대적 성찰과 가능성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크고 오래된 질문을 동반하는데, 이는 조각의 규범에 따라 그 범주를 재확인하는 것이기 보다는 “조각적” 사유를 매개로 조각의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쪽에 가깝다. 말하자면, 김채린은 고대부터 현대를 이어 동시대에 이르며 구축된 조각의 매체적 조건을 임의적으로 참조하면서 조각적 가능성을 살피는 실험을 주로 해 왔으며, 그 방대한 레퍼런스의 파동을 경험하면서 특히 “조각적 감각”에 대한 체험을 구체화 했다.

   그의 초기 작업은 특정 장소나 공간 안에서 신체 감각의 전환을 매개할 조형적 개입이 주를 이루었다. 전시장에서 숨은 사각 지대를 찾아 카펫을 깔았던 <Opening Ceremony>(2014)와 버려진 공간에 커튼과 LED 조명을 이용해 작품을 설치한 <아침을 여는 방식>(2015)이 그러하다. 전시장에서 받침대 위에 올려져 전시되기 전, 과거의 조각은 건축과 결합하여 벽과 벽 사이의 모서리나 바닥과 천장을 잇는 기둥 혹은 텅 빈 벽과 몸이 드나드는 문에 자리했다. 건축에서 조각이 분화되기 이전 상태를 참조하거나, 혹은 조각을 받침대에서 내려 실재의 공간과 평행하도록 이동시킨 현대 조각에 동화되어, 김채린은 조각의 한 형태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특히 <Opening Ceremony>의 경우, 실내 공간 내부의 한쪽 구석에 카펫을 깔아 과거에 조각이 자리했던 건축 내부의 모서리가 비어 있음을 지시하며 그곳에 살아있는 몸, 즉 누군가의 신체가 조각처럼 서있을 임시의 자리를 마련한 셈이다. 사실 김채린은 자신이 만든 임의의 조형적 형태를 매개하여 그것을 다루며 경험하는 신체가 공간 속에 함께 배치되는 순간을 지속적으로 조성해왔다. 마치 우연히 공간에 들어선 익명의 신체가 조각이 되는 순간을 예측했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러한 조각적 퍼포먼스의 확장은 조각 스스로 안무적인 상황을 함의하는 형태가 되도록 이끌기도 했다. 그것을 알리는 작업으로는 집에 대해 사유하며 건축 자재를 주재료로 하여 서로 지탱하면서 제 형태를 구축할 수 있게 한 <서로에게 기대서서>(2015)를 꼽을 수 있다. 이는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Untitled(Scatter Piece)>(1968-1969)와 같이 미니멀리즘 이후 산업적 재료들을 실제 공간 속에 흩어서 배치함으로써 몸의 인식을 강조한 삼차원적 구축물의 설치 경향을 떠올리게 했다. 김채린은 이때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재현적인 형상을 아우르면서 공간을 임시적으로 점유한 조각적 형태에 대한 (신체적) 지각과 (현상적) 인식의 경험을 강조했다.

김채린, <Opening Ceremony>, 카펫, 가변설치(원앤제이갤러리), 2014 

 

2. 조각의 과정을 형태 뜨기: 사물과 조각 사이

‘팔베개’ 연작은 2007년에 시작해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의 주요 작업이다. 형태 특성 상 <열아홉 개의 말랑거림>(2007)을 그 시작으로 생각해 볼 때, ‘팔베개’ 연작의 공통적인 감각은 조각의 캐스팅 기법에서 파생된 네거티브 형상과 그것에 대한 촉각적 지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열아홉 개의 말랑거림>에서 실리콘과 양모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비정형의 추상적인 형태를 만들었는데, 이때 두 개의 상이한 성질의 재료를 결합시켜 일종의 주물과 주형의 관계를 성립시켰다. 하나의 형태/재료가 또 다른 형태/재료를 감싸면서 각각의 표면이 서로 맞닿는 지점에서 서로가 서로의 윤곽을 (네거티브로) 반영하도록 했다. 이 조형적인 감각은 낱낱의 조각이 지닌 전체 윤곽을 구성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양감을 가진 온전한 덩어리로서의 조각을 인식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윤곽이 함의하는 부재, 즉 이 조각의 형태에 대한 네거티브로서의 비어있는 외곽을 인식하게 한다.

   <견고한 덩어리에 움푹한 말랑함>(2008)은 그러한 조각의 양가적 감각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낸 경우다. 석고로 만든 견고한 덩어리에 실리콘으로 움푹한 말랑함을 지닌 형태를 결합시켜, 소조의 주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설적인 감각을 “견고한 덩어리에 움푹한 말랑함”이라는 임의의 조형적 논리로 완결 지은 셈이다. 이는 <가장 편한 나의 자리>(2008)로 이어져, 개인의 신체적 감각을 서사화 하여 조형적 논리를 구축하는 형태로 본격화 된다. 턱을 괴고 있는 두 팔꿈치를 주물 뜨듯 감싼 형태로 움푹 패인 표면을 이끌어낸 <가장 편한 나의 자리>는, 둥근 원의 형태가 반복되는 유기체적 추상 형태로 완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몰드의 자격으로 텅 비어 있는 형태의 네거티브를 가시화 하여 조각의 형태와 맞닿아 있는 공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형상을 상상하도록 한다. 그것은 다분히 조각적 감각에 따른다.

   <팔베개: 느슨한 경청>(2011)도 같은 조형적 감각을 공유하는 가운데, 조각과 사물 사이에서 형태의 기능에 대해 사유하도록 한다. 이를테면, <팔베개: 느슨한 경청>은 시각적이면서 촉각적이고 재료의 물성과 조형적 구조가 유기체적인 연쇄를 이끌어내면서, 마치 공간 속에 자립하여 현존하고 있는 조각의 소임을 스스로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 형태가 함의하는 역설은, 전체의 윤곽과 맞닿아 있는 부재의 공간에서 상상되어지는 신체와의 결합에 있다.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결여를 내포하고 있는 이 조각의 형태에는 “팔베개”의 기능이 부여되어 있으며, 그것은 조각적 형태와 쌍을 이루는 인체 형상에 대한 상상과 그 둘 사이의 기능적 결합을 논리로 삼고 있다.

   이러한 조각의 형태와 기능 간의 매개는 김채린의 작업에서 일련의 “수행적” 형태에 대해 가늠해 보게 하는데, <열한 가지 조각>(2018) 연작이 “기능하는 조각”으로서 조각적 형태를 매개하는 일련의 상황을 보여줬다. 김채린은 <그로부터 비롯된>(2019) 연작에서 “사물조각”의 당위를 모색하면서, “개인화 된 사물”이 “그 자체로 작품의 재료”가 되는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로부터 비롯된: flying tiger>(2019)는 지우개, 밀랍, 호두나무, 시바툴 레진 등의 재료를 결합한 임의의 조형적 방식인 셈이며, <그로부터 비롯된: 거친, 해면>(2019)은 해면 스펀지, 거친 스펀지, 석고, 자갈 패블, 코르크 등 상이한 질감의 재료를 조형적으로 구축한 임의의 형태에 대한 정보를 나타낸다. 이 같은 기능조각과 사물조각에 대한 관심은, 이후 다양한 협업 및 프로젝트를 통해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조형적 가능성을 실험하게 됐다.

김채린, <그로부터 비롯된 flying tiger>, 지우개, 에폭시레진, 비즈왁스, 호두나무,
50x50x70cm, 2019

 

3. 조각과 결합하는 신체: 기능하는 조각 또는 안무적 조각

김채린, <행동유도조각 Affordance Sculpture>, 강화석고, 매트릭스네오, 경량석 점토, 핸디코트, 캐스터, 니트릴부타디엔고무, 1300T실리콘, 2020

<행동유도조각 Affordance Sculpture>(2020) 연작과 <조각음계>(2020) 연작은 조각과 결합하는 신체에 대해 환기시키면서, 안무적 조각의 수행성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Affordance Sculpture #1: 끌어당기기>(2020)는 강화 석고, 매트릭스 네오, 경량 석분 점토, 핸디 코트, 캐스터, 니트릴 부타디엔 고무, 1300실리콘 등의 재료를 사용해 물성이 각기 다른 동일한 형태의 둥근 조각 세 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때 이 셋의 형태와 물질 상의 닮음과 다름이 유도하는 신체의 수행성이 강조된다. 말하자면, 임의의 신체들[관객]은 공간 속에 놓인 “행동 유도 조각”을 매개하여 특정한 몸의 움직임과 형태를 만들게 된다.

   김채린은 여러 가지 물성을 지닌 재료를 사용해 마치 같은 틀에서 떠낸 것처럼 서로 닮아 있는 세 개의 입체적인 형태를 관객에게 제시하여, 그 형태들과 결합하게 될 신체의 수행성을 시각화 했다. 퍼포먼스의 상황처럼, 일련의 조각들은 행동을 유도하는 “기능 조각”이자 “사물 조각”으로 익명의 신체로 하여금 특정한 운동과 형태를 취하도록 하며 그렇게 발생한 수행적 “사건”은 조각적 “변환”과 교차하며 발생한다. 즉, 신체에 의해 조각의 형태에 대한 지각과 인식의 변환이 일어나며, 동시에 기능하는 사물로서의 조각에 대한 지각이 신체적 수행의 사건을 촉발시키는 셈이다. 그 결과, 조각이 놓인 전시장은 수많은 형태의 변화와 움직임이 가시화 되는 퍼포먼스의 장이 되며 그것은 삼차원의 조각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필연적 경험으로 제 당위를 얻는다. 전시장에 조각과 함께 현존하는 신체들은 이 조각적 사건에 긴밀하게 연루되어 한시적으로는 “조각화”된 신체로 구별된다. 이는 <조각음계>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가시화 됐다. 조각에 대한 신체의 현상적 경험이 극대화 된 이 사건은, 조각의 형태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과정 속에서 조각적 감각을 촉각과 청각 등으로 확대해 놓았으며 신체와 상호 작용하는 조각적 상상력을 통해 조각의 수행성을 강조했다.

   ⟪세이브 미 Save Me⟫(2022)에서, 김채린은 그동안 탐구해 온 조각에 관한 물음과 가능성을 또 다른 조건 속에서 갱신해 보려는 시도를 드러냈다. 그에게 조각의 “재료”는 물성과 형태를 주도하는 일차적인 조건이면서 동시에 조각적 경험 속에서 신체의 수행성을 매개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렇게 물질로부터 형태, 감각, 행위, 경험 등을 파생시켜, 일련의 조각적 (변환의) 사건을 구체화 했던 김채린은, 최근에는 재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조각의 생애 주기에 관한 물음과 가능성을 탐구한다. 김채린은 여수 장도에 있는 레지던시에 체류하며 작업하면서 주변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을 조각의 재료로 사용할 절차와 방법을 찾으려 했다. 이는 그간의 다소 복합적인 경험과 시도와 성취 등과 맞물려, 또 다시 “조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확장시켜 보려는 조각가로서 그의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김채린, <내일이 없던 과거의 오늘>, 굴패각, 바지락패각, 고둥패각, 황금가리비패각, 홍합패각, 전복패각, 동죽패각, 갑오징어뼈, 듀오매트릭스네오, 다채널비디오, 2022

   마치 오래 전 조각가들이 자연에서 조각의 재료를 가져온 것처럼 그는 버려진 조개껍질을 조금 더 원초적인 물질로 다루었는데, 그것을 가루로 분쇄해 다른 물질들과 배합하여 사용하는 식이었다. 이때, 김채린은 새롭게 얻어낸 조각의 재료를 완성된 형태로 환원시켜 조각의 형태 안에 종속시키기 보다는 그 물성 자체가 형태가 되는 사태에 이르도록 했다. 마치 어떤 물질들이 형태를 이루고 있는 암석들처럼, <내일이 없던 과거의 오늘>(2022)은 다양한 종류의 조개껍질을 분쇄하여 배합한 재료를 가지고 추상적인 형태의 현존을 드러나게 했다. 일련의 조각군을 이루고 있는 <세이브 미>(2022) 연작들은 그러한 태도를 반복하고 있는데, 버려진 물건과 작업하고 남은 재료들과 과거에 완성한 조각들을 버려진 조개껍질처럼 아무런 위계 없이 물질적인 차원으로 새로운 조각의 재료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그가 지속적으로 탐색해 온 조각의 안무적 움직임과 수행적 행위의 가능성은 조각가 자신의 수행적 “실천”으로 확대된다. 말하자면, 형태의 시지각적인 변환과 더불어 그것이 매개하는 연극적인 수행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채린은 조각가의 수행적 실천에 주목하게 되는 작업(의 과정)을 공개한 셈이다. 조개껍질, 스티로폼 택배 상자, 쓰고 남은 조각 재료들, 완성된 형태로서의 조각 등 기능을 다하고 “남겨진” 채로 현존하는 물건들을 조각의 재료로 가져와 그것을 물질적인 차원으로 인식하는 조각가의 연금술을 보여준다. 김채린은 이 과정을 통해, 조각가로서 재료와 형태 사이에서 스스로 수행적 실천의 당위를 찾으려 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조각적 “변환”이라는 현대 조각의 중요한 현상적 체험을 조각의 목표로 두기 보다는 조각의 조건으로 사유하여 동시대의 조각은 어떠한 실천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가치를 둔다.

김채린, <세이브 미 팔베개>, 강화석고, 석고강화제, 페인트, 에코플렉스0030실리콘,
53x35x32cm, 2022

김채린, <세이브 미>, 혼합재료, 가변설치, 2022

김채린, <세이브 미>, 다채널영상, 2022

  • ‘세이브 미’는 홍승택이 퍼블릭아트 2022년 1월호에 김채린 작가에 대해 쓴 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본 글은 [2021년 GS칼텍스 예울마루 레지던시 비평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해당 기관의 지원을 받았음

 

안소연 (미술비평가)
안소연은 미술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언어를 통한 이미지 사유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왔다. 최근에는 비평의 언어와 글쓰기 행위를 통해 예술적 삶의 가치와 실천의 방법을 찾고 있으며, 창작으로서 비평적 협업의 방법들을 실험하고 있다. 비평적 말하기 활동으로 “인터뷰 프로젝트-우리 시대의 예술가”(스페이스윌링앤딜링, 2021)를 기획하여 진행했으며, 조각에 대한 동시대적 변화의 조건과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한국 동시대 조각의 매체 조건과 수행성의 변화”(예술과 미디어 학회, 202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