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된 위상(位相)

김주옥(홍익대학교, 예술학)

이재원 작가는 자신의 생활공간을 담은 풍경이나 주변 사물이미지를 수집하여 “구체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구체’의 이미지는 정확하게 말하면 360도 파노라마 이미지와 같이 둥근 구의 형태 표면의 이미지에서 연유한다. ‘구체’라고 하는 단어는 공처럼 둥근 형체를 뜻하는 ‘구체(球體)’를 연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구체적(具體的)’인 이미지라는 뜻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다. 작가의 작업 전반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엿볼 수 있다.


구체(球體)의 구체화(具體化)
작가의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둥근 구의 모양을 한 설치-영상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구의 전개도 작업이다.
그의 설치-영상 작업에서는 둥근 구(球)의 형체를 한 설치물에 영상 장치를 설치하여 시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반투명해 보이는 구 안쪽에 카메라가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그 카메라가 보는 풍경을 모니터 화면에 연결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관객은 모니터 화면을 통해 카메라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동시에 그 구의 표면을 바라본다. 멀리서 이 설치 오브제를 바라볼 때에는 단순한 구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 모양의 오브제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안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카메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대상을 관찰한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시선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그가 자리한 위치에 따라 변화한다. 다시 말해 관객이 바라보고 있는 구의 표면은 카메라의 눈에는 새로운 풍경의 요소가 되고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관객 자체도 새로운 시선 주체의 대상이 된다. 하나의 풍경을 바라보는, 안에서 바깥으로 뻗은 시선과 그것을 다시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공존할 때 그 바라봄의 시선 축은 결국 이미지로 구성된 풍경에 균열을 만들어낸다. 결국 ‘바라본다’라는 것은 내가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작용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보는 대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작가는 이러한 생각에서 한 발짝 더 멀리 간다. 그가 이번 전시의 제목을 ‘리토폴로지(re-topology)’라는 ‘표면을 재구성 한다’라는 3D 그래픽 용어를 사용한 데에는 앞서 제시했던 풍경의 균열을 통한 인식과 지각의 틈을 좀 더 강조하는 행위로 보여진다. 작가의 전개도 작업은 작가가 3D 그래픽 툴을 활용하여 이미지를 변형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동시대 가상현실 환경을 만드는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작가는 구의 표면을 둘러싼 이미지를 다시 평면화 시키는데 단순히 구의 이미지를 평면의 전개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상에서 면을 다른 모양으로 구획하여 재배치 한다는 ‘리토폴로지’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작가가 위상학적 데이터로서 ‘리토폴로지’한 ‘폴딩 이미지’를 사용할 때에는 그것이 내용상 구체(具體) 이미지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도구와 매개적 매체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본다’는 것에 대한 ‘인식’ 활동 전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차원의 변이(mutation)
전통적 회화에서 다루었던 풍경의 재현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옮기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점점 더 2차원의 평면에서 이미지를 보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 컴퓨터 화면이나 스마트 폰 등의 화면 액정에서 2차원 평면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분명 3차원의 물체를 2차원에 재현했을 때엔 왜곡이 존재한다. 전통 회화에서 그 왜곡을 줄이는 방법을 원근법이라는 작위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해왔다. 하지만 현재 화면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3차원의 대상은 기존 회화에서의 원근법이 그랬던 것처럼 컴퓨터의 언어를 통해 그 왜곡과 차이를 번역한다. 컴퓨터라는 가상의 세계 안에서는 3차원, 2차원이 단지 컴퓨터의 숫자 언어인 0과 1의 언어로 구성된다. 그리고 평평한 2차원의 화면 모니터에서 0과 1의 조합으로 구성된 ‘3차원처럼 보이는’ 입체물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회화의 역사에서 디지털 코드의 번역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 왜곡의 틈을 지우려고 했던 수많은 작업의 역사는 참으로 길고 길었다. 하지만 그 노력들이 무색 해질 만큼 이재원 작가는 그동안 지우기 위해 노력했던 그 간극들을 다시 거꾸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는 왜곡과 차원의 간극들을 다시 끄집어 내 확인하려는 듯 입체적 구의 표면 이미지를 다시 평면에 재단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구체이미지’를 사진의 이미지로서가 아닌 ‘데이터’로서 가지고 있는 의미에 주목한다. 작가는 이러한 가상공간 속의 이미지의 표면의 평면적 이미지를 다양하게 면을 분할한다. 그리고 여기서 존재하는 왜곡을 더 심하게 왜곡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우선 그는 3D 그래픽 툴을 사용하여 구체이미지의 가상적 물질성을 실험한다. 그래픽 프로그램 안에서 이미지를 구기거나 펴거나 접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표면을 인위적으로 왜곡하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변형된 이미지들로 다시 평면의 전개도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접어 입체의 구조물을 만든다. 여기서 작가가 왜곡을 더 심하게 보이도록 강조하는 부수적인 행위는 3D 그래픽에서 물체를 표현할 때 쓰이는 기본 단위인 다각형, 즉 폴리곤(polygon)들이 결합하여 입체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부추기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3D 오브제(objet)’라 칭하자면 이 오브제가 컴퓨터 안에 들어가 있을 때 구조물 겉을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는 배치된 위상을 통해 만들어진, 다시 말해 토폴로지(topology)된 이미지이다. 만약 이 오브제의 표면의 이미지는 위상을 재배치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리토폴로지(re-topology)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토폴로지를 통해 표면을 나누고 리토폴로지를 하며 그 표면을 다시 재배치하는 것은 ‘가상의 그래픽 안’에서 그 이미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실제 존재하는 오브제와 가상의 오브제는 실제 그렇게 만들어진 것과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이미지의 차이만큼 다르다. 마치 3차원의 오브제처럼 보이게 2차원에 재현된 이미지를 다시 3차원의 물체로 만들었을 때의 데이터들이 서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현실 속의 오브제와 컴퓨터라는 가상공간 안에서 보고 있는 오브제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분명 우리는 현실 속 오브제를 나의 육체를 통해 매개된 지각을 통해 관찰하는 방식으로 그 형태를 인지한다. 그리고 현실 속 오브제를 2차원의 평면에 옮겼을 때 원근법과 양감 등의 요소를 통해 그것을 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 언어로 변환된 가상공간 속 이미지는 사실과 진리 사이에서 어떻게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어떤 해석의 단계를 거쳐 이해하는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질 뿐이다.
여기서 디지털 이미지의 원리를 생각해 봤을 때, 디지털 이미지는 0과 1만으로 구성된 공간에서 계속 변화된다. 이러한 변화(mutation)은 이미지와 0/1이라는 숫자를 같은 층위의 것으로 만드는 ‘번역’과 같다. 여기서 번역의 과정은 동시적이고 쌍방향적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와 숫자는 그 본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둘 사이의 존재하는 통일성은 ‘이가적 동시성’을 통해 상호번역 된다. 여기서 번역이 성공한다 할지라도 이미지와 숫자는 동등(equivalent)한 관계일 뿐 동일성(identité)을 가진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즉 번역은 동등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지훈, 「가상현실의 형이상학 라이프니츠 철학의 옹호」, 『철학』 제58권, 한국철학회 (1999. 2), pp. 131-132.


가상적 게슈탈트(Gestalt)
플라톤이 동굴의 일화를 통해 해석한 존재론은 우리는 신체를 통해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한편 니체는 인간의 지각은 절대적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가상주의와 관점주의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니체는 결국 해석을 통해 관점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는데 그 관점은 우리 모두가 각기 다르게 가지고 있다. 니체는 플라톤과는 달리 진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가상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니체는 인간 모두 저마다의 해석의 주체라고 말하며 해석을 ‘힘에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라 보았다. 신상규, 「우리가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다면」, 『헤겔연구』 , No. 20 (2006), 한국헤겔학회, p. 72.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에서는 형태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보다 지각되어진 상(像)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감각은 주로 육체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가상성 그 자체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가상적 이미지의 내용과 형식이 아닌 그 이미지들의 표면에서 가상 이미지들을 구성한다는 것을 상상할 뿐이다.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1, p. 9.

가상성에 접근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위상학적 접근이다. 위상학은 자기 변화와 자기 변형의 과학이다. 그래서 위상학적 도형과 기하학적 도형은 서로 다르다. 어떤 이미지가 만약 가상적이라면 그 이유는 우리가 사실적으로 그것을 볼 수 없거나 완벽하게 도형화 할 수 없는 경우를 가리킨다. 우리고 그것이 ‘이미지’인 이유는 그것이 상상 속에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 책, p. 231.
가상적인 것은 결국 위상학적이기 때문에 위상학은 모델의 변용을 통해 접히고 펼쳐지는 변형이다. 하지만 위상학적인 그리고 가상적인 이미지라 할지라도 우리의 지각과 감각과 사유는 모두 항상 외부에서 오는 것을 변형시켜 느낄 수 있는 작용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상의 위상학적 이미지를 아날로그적 존재 방식을 통해 사유하며 감각한다.
사실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성을 아날로그적 존재 방식을 통해 사유하며 감각한다는 것은 모순된 것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유와 감각은 서로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지각은 추론이 아닌 비매개적 접근으로 획득된다. 그래서 만약 양감을 가진 오브제를 바라본다면 그 오브제의 지각된 형태는 양감에 대한 추상적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잠재적으로 가능해진다.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과 사건-활동주의 철학과 사건발생적 예술』, 정유경 옮김, 갈무리, 2016, p. 79.
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은 추상적이고 잠재적인 관계를 체험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한 오브제의 출현은 온갖 종류로 구성된 잠재적 운동이자 하나의 사건이다. 앞 책, p. 81.
이러한 의미에서 이재원 작가는 현실의 잠재태로서 가상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미지들은 단지 가상에 존재하는 상태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그것들을 현실세계로 끄집어내는 역할을 하며 그것이 현실의 잠재태로서 기능하는 가상적 이미지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주기 위해 우리를 전시장에 초대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신상규, 「우리가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다면」, 『헤겔연구』 , No. 20 (2006), 한국헤겔학회, pp. 266- 299.

이지훈, 「가상현실의 형이상학 라이프니츠 철학의 옹호」, 『철학』 제58권, 한국철학회 (1999. 2), pp. 127-150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1.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과 사건-활동주의 철학과 사건발생적 예술』, 정유경 옮김, 갈무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