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시의 타이틀(나는 블랭~리스트다!)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테러 이후 “나도 샤를리다!”를 외치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테러와 폭력적 억압에 저항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또 제목의 문구를 자세히 보면 ‘Black’(검은) 은 교묘히 ‘Blank’(빈)와 뒤섞여 있다. 알파벳 n은 45도로 꺾여 n인지 c인지 모호하게 보인다. 또 한국사람들이 블랙리스트를 발음하는 습관에서 블랭~리스트로 발음하는 오류에서 힌트를 얻어 Black (검은)을 Blank(빈)으로 슬쩍 바꿔 버렸다. 한국인들이 블랭~리스트로 발음하면 영어권 사람들은 블랭크 리스트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결국 ‘블랙(Black) 리스트’는 ‘블랭~리스트’로 발음되어 ‘블랭크(Blank) 리스트’로 바뀐 것이다. 일종의 언어표현의 유희로도 볼 수 있다. 자칫 무겁기만 한 전시주제를 유머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언어의 유희와 유머는 진지한 현실을 반영한다. 단어 ‘Blank’는 ‘Black’의 낙인보다도 더 허탈한 우리의 문화예술 환경과 예술가들의 외침이 공허한 사회, 공허하게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한국의 오늘을 반영한다.

 

10여명의 각기 다른 표현매체로 작업하는 한국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로서 2017년 초부터 비선실세, 대통령 탄핵과 맞물려 한국문화예술계에 큰 쇼크로 다가왔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전시의 주요한 주제와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전시는 2주간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성북도원’(성북문화재단 공간후원)에서 행해지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조각, 설치, 회화, 영상 등 다양한 시각매체를 통해 다루고 있다.

전시 제목: 나는 블랭(Black or Blank)~ 리스트다!

전시 기획: 심승욱 / 010-6456-9217 / ssim72@gmail.com

참여 작가: 김남현(조각), 김정모(설치), 남대웅(회화), 노동식(조각), 박승예(회화), 심승욱(조각), 이지양(영상), 장서영(영상), 조영주(영상), 황문정(설치)

전시 일정2017년 3월 15일 ~ 3월 28일 (2주간) / 오프닝: 3월 15일 오후 3시부터~

전시 장소: 성북도원 (성북문화재단 공간후원) 성북구 성북로 31길 126-9

 

2017년 새해부터 한국 문화예술계는 정부의 블랙 리스트 (Black list) 사건으로 시끄럽다.

이 사건은 정치권력에 의해 비밀리에 정부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해 문제가 된 사건이다. 문화예술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의 실체를 보게 된 순간이다.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감시 당하고 통제된다는 것은 공포와 경직된 태도를 유발한다. 벤덤(Jeremy Bentham)과 푸코(Michel Foucault)가 언급한 파놉티콘을 떠올리게 하는 사회통제 시스템은 오늘날 한국문화예술 생태계에 뿌리깊게 자리 해오고 있다.

현대 예술표현의 내제된 본성은 시대와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다양한 예술언어로 재생산 하려는 욕구에 기반한다. 그것은 불안정하지만 새롭고, 비가시적이지만 변화하는 다양한 세계를 만들어내며, 비폭력적이지만 무엇 보다 강렬하게 인간의 권리와 가치를 강하게 주장하도록 만든다. 이런 예술의 힘은 정치권력, 특히 부패한 권력이라면 성가시고 두려운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사실 우리사회 속에서 문화와 예술은 자유롭지 못해왔다고 생각한다. 풍자는 공격받았고, 저항은 수용되지 못했으며, 남과 다른 다양성은 조롱 받았다. 그것은 꽤나 오랜 시간 우리의 문화예술계에서 벌어졌던 미성숙함 이었고 자연스럽게 경직된 태도와 한계가 분명한 창작 표현의 범위에 익숙해져 새로운 타협점을 마련하며 만들어진 소극적 태도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 속에 조용히 참착 되어왔다.

특히 극명히 이분화된 정치 이데올로기의 잣대는 나와 다른 남을 수용하지 못하는 극도의 편협함으로 자리하고 고스란히 문화예술 창작과 표현의 다양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략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세련됨으로 포장된 예술표현은 무난하게 수용되고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얻었고 이질적이고 문제를 만드는 예술은 거부당하며 설 자리를 내주지 않는 환경에서 예술가들은 살아가며 편협한 잣대와 틀을 거부하는 강직함은 무뎌졌다.

심지어 한국미술계는 수많은 내부적 문제들을 발생시키며 대중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하였다. 작품의 위작 대작 사건, 예술계 성희롱 사건, 단체간의 이권다툼, 자금세탁의 도구로서의 미술품수집, 국공립 단체장 인선문제에 이르는 헤아릴 수 없는 사건사고는 경직된 한국 문화예술 생태계의 운신의 폭을 더 좁게 만드는 자충수를 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시는 그런 오늘날 문화예술환경의 위기 속에서 작가 개인이 경험하는 다양한 사회적 한계와 경직성의 실체는 무엇이고 작가는 이 속에서 창작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 전시는 단순히 우리 눈앞에 벌어진 블랙리스트 사건의 1차원적 비판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사회가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이 시점에서 문화예술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진지한 사회적 논의와 성숙하고 폭넓은 수용의 태도가 재생산되는 하나의 작은 노력으로 기억되길 소망한다. – 글 / 전시기획 심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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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01 표현의 자유? / 질문02 블랙리스트?-

김남현블랙리스트에 관하여

윤동주의 시에서

팔 복(八福)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김정모-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읍읍’은 입이 막혀 소리가 나지 않는 상황을 표현하는 의성어이다. 인터넷 상에서는 주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대상을 지칭할 때, 누군가가 입막음을 하거나 또는 자기검열을 통해 거론하고자 하는 대상을 의성어로 치환하는 형태로써 쓰인다. 이것은 말 한 마디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풍자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남대웅-블랙리스트에 관하여 / 표현의 자유에 관하여

나는 블랙리스트에 당연히 올라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찾아보았지만 나의 이름은 그곳에 없었다. 2012년 12월 19일 치를 18대 대통령 선거 약 한달 전인 10월말에, 그것도 청와대가 걸어서 10분 거리도 되지 않는 곳에서 우리나라에서 절대권력이란 무엇인지, 그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화 되는지에 관한 ‘제왕본기’라는 타이틀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타나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이미지를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리지 않았다. 현 정부는 텔레스크린 같은 기계나 체링턴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반대로 예술가들 또한 텔레스크린 같은 기계나 체링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감시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예술이라는 제도 안에서 허용된 것이고, 창작의 자유 또한 사회라는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나의 생각이나 감각이 진정 ‘자유롭다’라고 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적 한계에서 존재하는 나의 생각들과 감각들을 의심하고 감시하며 나 스스로를 반성하는 태도에서 다시 세상을 바라볼 때 나를 규정하고 있는 제도에서 비로소 조금 더 자유로워 질것이다. 나 또한 이러한 반성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현 정부가 권력과 돈으로 예술가들을 제안하려는 행위가 있었음에도 윈스턴처럼 전혀 알지 못한 스스로를 다시 반성한다.

노동식

이명박 정권초기 광우병 사태가 벌어졌을 때 일이었다. 본인은 한 인터넷 사이트에 있는 공유 공간에서 정부 비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나서 갑자기 모 은행에서 편지 한통이 왔다. 금융거래 정보 등의 제공사실 통보서가 왔다. 부산 지검에서 본인의 계좌를 연람 한 것이다. 본인에게는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괜히 불안하고 불쾌했다. 그렇게 7년정도 지났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다른 은행에서 편지 한통이 왔다. 이번에도 금융거래 정보 등의 제공사실 통보서였다. 이번에는 서울중앙지검이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 때문일까 생각하다 바로 떠오른 생각 세월호 작업이었다.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또다시 불안하기 시작했다. 이런 여러가지 일을 통해 본인은 핸드폰을 국산폰에서 아이폰으로 바꾸고 노트북 렌즈 부분을 테이프로 붙이며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나 스스로가 사전 검열을 해야 하나 걱정이 들기도 한다. 자유로운 국민의 기본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 받으니 모든 것이 불안해진다. 

 

박승예

히틀러가 제 눈에 불편한 예술품들을 가져다 모아 ‘퇴폐미술’로 명명하며 불태워 버린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혹자는 “예술의 존재의 제1가치는 그것이 당대의 문화를 함축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라고 말한다. 당 시대의 예술에 있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다는 것을 돌려서 설명하자면, 결국 조선시대 사관의 역사의 기록을 누군가 훼방하여 조작하는 것과도 비유될 수 있는 그것이 아닐까의 생각을 해본다.

벌어질일?이 벌어졌다. 비뚤어지고 억압된 독재의 등장은 곧바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키 시작하고, 그를 위한 위협과 같은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내고야 만다. 죄과가 많은 이는 제풀에 그 불안과 두려움으로 타인의 입을 막으려 들고 만다. 역사 속의 데쟈뷰와 같다. 두려움이 향하는 공격의, 불안의 타깃의 방향은 늘 같다. 그곳을 바라보면, 진실을 알 수 있다.

 

심승욱블랙리스트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시절 아침체조시간 앞줄 중앙에 선 아이가 “기준!” 하고 외치면 아이들은 양팔 간격으로 벌려 선다. 오늘날 한국 문화예술 속에 자리한 이 외침, ‘기준!’은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오늘날 정치권력은 그러한 한국문화예술의 습성을 잘 이해했고 영리하게 이용하려 했다! 예술의 속성은 가끔 잘 짜여진 오와 열에서 이탈해 서있는 아이와 같아야 한다.

 

이지양( █ ) 

비어있는 공간은 채워짐을 잠재한다. 비어있는 상태라는 의미를 지니는 blank의 기호는 두 개의 괄호 사이에 공간을 형성한다.. 그 안에 채워지는 대상들은 다른 부분들과 구별 혹은 강조되기 위해 특정 기호 공간 속에 한대 묶어진다. 닫혀진 기호 안에 위치한 대상은 이로서 공간이 작용하는 힘의 영역 안에 들어서게 된다.

 

장서영-Bla(n)(c)k List 

20년 전에 우선 순위 영단어라는 책이 꽤 유행했다. 지금도 있나? 잘 모르겠다. 이 책은 단어인지 그 뜻인지가 빨간색으로 써 있어서, 동봉된 빨간 셀로판지를 덮으면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 이 특징이었다. 분명히 써 있지만 보이지 않게 되기 위해 써 있는 것, 이건 블랙리스트의 작동 방 식이다. 블랙리스트 위에서는 쓰는 것이 곧 지우는 것이 된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써넣는 것은, 앞으로 있을 호명 가능성을 삭제하는 것이다. 이름의 주인에게 있어서는 앞으로 어떤 기회에도 호명되지 않게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이름을 삭제 당하는 것과 같다. 블랙리스트 위에서 이름은 블랭크 처리되고 묵음의 기호가 된다. 호명은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식별 기호 없이는 다른 것과 구별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는 이름을 쓰면서 삭제하 는 도구이고, 튀어나오지 못하게 누르는 도구이며,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을 없애버리는 도구이다.

조영주블랙 리스트에 관하여

늘 그래왔듯이,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공공 기금, 레지던시 등을 지원했다. 언제나처럼, 합격 소식보다는 불합격 통지를 주로 받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자책했다. 지원서 내용이 부실한 것인지, 아이디어가 참신하지 않은 것인지 고민해 보다가 내가 예술적 자질이 부족한가 보다는 힘없는 결론을 내고는 만다. 지원서를 쓰는 것이 작가의 일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일상적이고, 불합격 통지 역시 놀랄만한 사건은 아니지만, ‘다음 기회에’라는 불통의 답변은 매번 나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지난겨울, 최순실에 관련한 청문회를 보는 것이 일상이었던 때의 어느 날, 문득 내가 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최근 예술가 지원 공모에서 불통의 답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친구에게 이 생각을 전하자 본인 역시 최근 몇 년간은 공모에 당선되지 않았다고, 내 말이 맞는다고 확신하였다. 우리 둘은 인터넷에 떠도는 블랙리스트를 찾아 둘 다의 이름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인터넷에 배포한 리스트는 뭔가 다른 음모를 위한 것이고, 우리는 진짜 블랙리스트, 그러니까 그 높으신 분들만 보는 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

 

황문정-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더이상 작업실에 박혀 작업하는 것만 로맨스인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요즘 작가들은 배는 고프지만 뚝심 있는 독불장군이 아니라 밖으로 나온 만능 엔터테이너같다. 작가 인터뷰, 아티스트토크, sns을 통한 자기 홍보는 물론 레지던시, 지원금 공모를 위해 글도 써야 하고 공공지원을 받으면 그에 따른 요구사항도 이행해야 하며 인맥관리까지 마치 연예인처럼 매니저가 필요할 지경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은 더더욱 높아지고만 있다. 편리성과 효율성을 위한 장치들은 끊임없이 개발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대가 도래했는데, 우리의 정체성은 도리어 모호해지고 있다. 마치 작업을 하기 위해 땅을 사고 대들보를 세우고 작업장을 직접 시공하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사회 변화에 따라 시대가 원하는 작가상도 변화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 소통의 과정이 될 수도 괴로운 과제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사회 추세에 따라 변화할 것인지, 기존의 태도를 고수 할 지, 그 선택은 나의 몫이다.

 

 

김정모 / 불타는 읍읍읍

‘읍읍’은 입이 막혀 소리가 나지 않는 상황을 표현하는 의성어이다. 인터넷 상에서는 주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대상을 지칭할 때, 누군가가 입막음을 하거나 또는 자기검열을 통해 거론하고자 하는 대상을 의성어로 치환하는 형태로 쓰인다. 이것은 말 한 마디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풍자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불타는 읍읍읍’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건물의 미니어처로 만들어진 양초이다. 양초는 투명한 플라스틱 박스에 포장되어 전시를 통해 저렴한 가격에 판매된다. 양초의 구매자는 심지에 불을 붙여 촛불에 의해 형태가 무너지는 그 특정한 건물의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다.

 

남대웅 / 제왕본기

남대웅의 작업 <제왕본기> 시리즈의 주제는 권력과 그 속성에 관한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한 대통령 역할의 배우들을 그리며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 진 권력의 정점, 즉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재구성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통령 역할을 맡은 배우 이미지의 한 장면을 통해 권력에 대한 독점욕이나 열정, 향수, 오만, 번민, 미련, 나약, 화려함, 덧없음, 무상함 같은 가치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각으로 내재화하여 표현한다. 여기에서 근대한국이라는 시공간을 통한 권력이란 실제 권력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려보는 권력의 속성을 역사적 사건에 투영하여 이해되는 권력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라는 형식 자체가 허구이므로 드라마나 영화의 영상을 통해 그가 재구성하는 이미지는 가상을 다시 재가상화 하는 셈이다.

우리는 언제나 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통제되고 지배 받는다. 그렇다면 그 권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권력의 실체는 스크린 위에서만 비쳐지다 상영이 끝나면 사라져버리는 허깨비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권력이 가진 그 실체 없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박승예 /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는’ 그것. 두려움이 만들어 내는 ‘괴물’

어릴 때 나는 공포영화를 전혀 볼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리고도 들려오는 소리들에 그만 볼륨을 낮추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달음질쳐 어딘가로 도망질을 치기까지 할 만큼 겁이 많은 아이였더랬다.

차츰 나이를 먹어가며, 무언가 실험적인 마음에 꽤나 유명한 공포영화 시리즈를 틀어놓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응시하고 있었을 때, 외려 당혹스러움에 놀라고 말았던 것은 영화가 결코 내가 간혹 꾸곤 하는 별로 특별하지 않은 악몽보다도 덜 무섭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라는 것은 결코 나의 머리와 마음속의 “상상”만큼의 두려움도 재현해 낼 수 없던 것이었다.

실제의 삶 속에서 나를 위협하고, 나를 불안케 하는 두려움의 근원은 대부분 나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지곤 한다. 결국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 두려움의 가장 커다란 실체는 나 자신이 만들어 가고, 마주치는 나 자신임을 깨달아 간다.

나의 작업들은 나의 내부와 외부 속에 존재하는 각각의 “나”들이 서로를 만나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들이 다름의 모순을 의식하며, 그 공생의 방법을 모색하고, 그에 있어 “깨어있음” 이라는 각성의 상황으로써 뒤숭숭한 불안과 불만의 삶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이다. 작가 본인은 스스로 이것을 “나의 작업은 이 괴물들이 서로 맞닥뜨리는 전쟁터” 라 부르곤 한다. 거울 밖의 내가 거울 속의 내가 들어 올리는 것과 다른 방향의 팔을 들어 올리듯이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인지해낸다. 또한 거울 속의 나는 거울 밖의 내가 실제의 삶 속에서 지니고 있는 또 다른 기준과 욕망을 알아채고 만다. 그들은 그러나 결국 서로로부터 달음질쳐 도망갈 수 없는 하나의 존재로 공존함을 피차간에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극단의 두려움을 자아낸다. 서로간의 모순을 지닌 그들이 만나 일그러지고, 흔들리며, 불안을 뚝뚝 떨구어 내는 불안정의 순간을 그려내고자 한다. 그것은 나의 “극복”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한 공존의 순간에 쏟아지는 두려움과 부정의 뒤숭숭함과 불안을 나는 “깨어있음”으로써 받아들이고자 한다. 나의 모순과 불완전, 그리고 불안전을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혹자는 이러한 나의 작업의 형상들을 ‘이중 자아상’ 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가 만들어 가는 두려움과 나 스스로의 불완전이 나를 묶어두기를 원치 않는다. 내 밖의 괴물과 내 안의 괴물이 서로를 만나 충돌하는 아픔은 나를 깨어있게 해주는 각성제가 될 것이다.

 

장서영 <어둡고 공허한 (Dark and Hollow)> 단채널 영상, 6 분, 2014

역술가가 이름을 풀이하는 과정을 말하는 그대로 받아적어 프롬프터용 대본으로 만든 영상이다. 역술가가 해석한 결과에 따르면 의뢰한 이름은 어둡고 공허해서 속히 개명해야 한다고 한다. 이 작업은, 불투명해서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와 그 구조 내에서 분해되고 임의로 평가되는 개체를 다루고 있다. 불투명한 구조는 이해할 수 없는 자의적인 규칙에 의해서 작동하고, 그 안의 개체는 본질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층위에서 평가된다.                    

 

조영주, 그룹 ‘Global Alien’ 프로젝트 / 프로 테스트 테스트 (Pro Test Con Test)

Pro-test 는 ‘앞에서, 앞으로’ 라는 단어 “pro” 에 “증언하다” 혹은 ‘증인의 역할을 행하다’는 단어 “test”가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그래서 프로테스트란 앞에서 증언하는 것, 자신이 겪은 부당함, 부정의를 사람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행위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자신의 증언을 들어주고, 그를 판정해주며, 그 증언에 함께 공감해줄 잠재적인 동료들이며, 그 증언의 힘을 통해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우리’들이다. 시합, 대회의 의미를 갖는 단어 con-test의 어원은 Protest 와 동일하다. 여기에는 어근 “pro” 대신 “con” (함께)이 붙어있는 것이 다를 뿐, ‘증언하다’, ‘증인의 역할을 행하다’라는 동사는 같다. 그러니까 contest의 본래 의미는 ‘함께 증언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시합이나 대회의 의미를 갖게 된 이유는, 어떤 시험이나 대회를 진행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를 참관하고 승패를 가늠해 줄 ‘증인’을 부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 작업은 이 두 단어, Protest 와 contest ‘증언하다’, ‘증인의 역할을 행하다’라는 행위에 근거하여 공공 장소에서 행한 퍼포먼스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계에, 사람들 ‘앞에 나아가’, 사람들을 향해 ‘증언’해야할 부당함, 부정의가 늘어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protest 하기를 멈출 수 없다. 우리는 그를 사람들과 함께(con) 증언하고자 한다.

(김남시의 ‘프로 테스트 콘 테스트’ 중)

 

성북도원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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