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그 나라의 대표성을 띄기도 하면서 그 나라에서는 보편화 할 수 없는 특수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는 어쩌면 마천루의 빌딩숲의 이미지 말고도 ‘부동산’이라고 하는 주제가 그 저변에 깔려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기도 하다. 

이원호 미디어설치 아티스트도 이런 부분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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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浮)부동산>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집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특별하다. ‘내집마련’이라는 단어가 고유명사처럼 각종 은행의 청약저축통장과 대출제도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결혼과 출산에 이어 사회인으로서의 미션 수행의 최종단계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집은 복잡한 속성을 가진 재화이다.

집이 가지고 있는 속성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속성은 자산으로서의 속성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2011)의 저자 박해천이 통찰하였듯이 대한민국 주거형태의 대표로 상징되는 아파트는 유동자산의 흐름을 분석하는 주요 경제 지표이자 중산층의 열망의 대상이었다.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에게 집은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인생평가기준의 주요한 척도이자 자신이 속한 사회 계급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원호의 작업에 등장하는 집은 통상적인 평균 중산층, 혹은 중산층을 열망하는 자산으로서의 집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한층 강화된 욕망을 직접 확인시키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2014년 진행한 프로젝트<부·동·산>(2014)에서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재개발 지역의 전셋집을 소개해 준 부동산 사장과의 협업을 선보였다. 전시장에 선보인 사진 이미지들은 매물로 나온 건물의 부분 이미지들로, 관람자들은 예술작품으로서 건물과 해당 지역의 지도들을 감상한 후, 퍼포머로 나선 부동산 사장의 지극히 현실적인 건물매매 조건을 들으며 다시 이미지를 감상하는 과정을 겪는다. 퍼포머가 건물의 평수와 시가, 재개발 가능성 등을 설명하는 동안 감상자의 머릿속에서 예술로서의 건물의 이미지는 모두 씻겨 내려가고 감상자는 집을 열망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번 <아티스트 파일>전시에 신작으로 선보이는 <부(浮)부동산>프로젝트는 ‘노숙자의 집’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집의 근본적인 속성을 살펴본다. 작가는 서울역이나 남대문 지하보도, 영등포 등 노숙자가 주로 거주하는 장소를 찾아 다니며 종이박스로 집을 짓는 노숙자에게 가격을 물어보고 흥정해서 구입하여 전시장에 설치한다. 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노숙자가 스스로의 집이 세워진 땅의 면적을 계산하고, 가치를 부여하여 돈으로 환산하는 과정이다. 통념적으로 집의 소유와 가치는 중산층의 몫이지만 집이 부재한 홈리스에게도 집은 여전히 열망의 대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인 집의 소유를 부정당한 형태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는 홈리스들이 제작하여 가공한 박스집을 소유하고, 경제적인 가치를 다시 부여하는 과정은 부동산 재테크의 방식을 답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박스집에 가치를 매기는 과정은 최소한의 프라이버시, 안전, 보온 등과 같은 집의 본래적 가치와 맞닿아있기 때문에 통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의 가치와는 차별된다. 이들이 자신의 공간에 부여하는 가치는 본능적이고 본래적이다. 이들의 가치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이라는 재화에 부여하는 ‘잉여’의 가치가 삭제되어 있다. 이원호는 집이 내포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프로세스 속에서 집의 정직한 본색을 드러내고, 그것의 사회적 좌표를 지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원호 홈페이지 http://wonholee.net 에서 발췌)

 

이원호가 주목하는 부분은 개인의 주거 공간으로서의 ‘집’이 아닌 어떤 ‘부의 상징’이 되어 버린 아파트와 집에 대해 고찰한다. 이원호는 필수적인 주거의 문제가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는 자산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터랩에서 시도해 본 이 [도시에 머무르다] 프로젝트는 작품에서 담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도시’에 머무는 각자의 방법과 그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그리고 서로 다른 형식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방법에 주목했다.

사실 ‘융합(融合)’이라는 것은 ‘녹아서 하나로 다시 생성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흰색이 검은색과 만나 흰색도 아닌 검은색도 아닌 회색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전문’분야의 지식을 쌓아왔다면 이제는 나를 둘러싼 그 ‘밖’에 관심을 갖는 행위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ditor 김 주 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