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적 에이도스(eidos) 

 

 

김주옥(홍익대학교, 예술학)

 

 

지난 7월, 가나아트 한남에서 진행되었던 《Ambiguous wall-eidos》전에서 김병주 작가는 <Ambiguous wall> 시리즈의 부조 작품을 선보였다. 이 부조 작품들은 작가의 이전 공간-설치작품과는 다르게 구조물의 한쪽 면이 벽에 붙어있다. 마치 평면에서 입체적-그림자의 환영 이미지를 탄생시키듯 2차원의 평면이 3차원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언뜻 보면 이번 부조 시리즈들도 과거의 설치작품과 마찬가지로 그림자들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로 인해 구조물의 조형적 이미지를 확장시키는 효과를 준다. 하지만 작가는 이번 부조 작품 시리즈를 통해 우리에게 물체를 지각하는 방식이나 형태나 공간을 인식하는 방법 그 자체의 전환을 요구한다.

 

 

 

 

우선 기존에 작가가 작업하는 방식은 빛을 통해 3차원의 공간 설치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하여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입체적 구조물의 그림자는 벽, 바닥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작가가 이전 작업에서는 건축물을 닮은 평면의 그림자 이미지를 공간 곳곳에 가변적으로 확장시켰다면, 반대로 이번 부조 작품에서는 원근법 기술이 적용된 투시도를 잘 표현한 부조의 구조체가 빛의 그림자를 통해 비로소 그것의 3차원적 형태와 공간감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다시 말해 이 부조 구조체는 벽에 걸려있지만, 이전 전통 회화에서 다루었던 이미지의 환영성을 전복시킨다. 과거 회화의 역사에서 3차원의 실제 공간을 2차원의 평면 옮길 때 사용했던 환영주의는 르네상스부터 이어져 온 원근법에 의해 흐트러짐 없는 단일시점의 회화적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통해 우리는 시관(視官)을 운용하는 법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모더니즘 회화에서는 평면성이 강조되었는데 벽에 걸린 캔버스들이 추구했던 비환영적(non-illusionary) 이미지는 2차원의 회화가 응당 가져야 하는 회화의 대표 성질을 ‘평면성’이라고 강조하며 회화의 역사를 바꾸었다.

 

 

 

 

하지만 김병주 작가의 부조 작품은 이러한 역사를 뒤엉키게 하여 평면과 입체의 시각적 효과와 그것을 이해하는 우리의 인식의 틀을 교란한다. 단순히 ‘착시’ 효과로 설명할 수 없는 작가의 부조 구조체는 우리가 계속 탐구하고 있는 물음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듯하지만, 이따금 보이는, 캔버스 바탕을 빼꼼히 벗어난 그림자 이미지를 보면 우리는 다시 한번 미궁에 빠진다. 과연 우리가 보는 것은 무슨 형태인지, 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원물(原物)의 대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그 결정을 유보하게 만든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그림자를 실재라고 인식하지만, 사실은 그 그림자의 형상을 이데아가 비추어진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형태는 본래의 영원불멸한 이데아를 표상할 뿐이다. 또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언급한 단어인 ‘에이도스(eidos)’는 우리가 이데아 세계 속에서 살면서 보게 되는, 이데아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복사품들이다. 게다가 플라톤의 에이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와도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이렇듯 ‘보다(idein)’에서 탄생한 단어인 이데아와 에이도스는 우리가 보는 현상들마저도 다르게 해석하게 한다. 물론 에이도스는 형상(form)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지만, 그 뜻을 그리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상을 보는 우리는 작품을 통해 무엇을 찾아야 하는 걸까? 이 지점에서 김병주 작가의 부조 작업을 다시 바라보면 빛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그림자는 그것을 보는 이의 눈의 위치에 따라서도 변화할 수 있는 형상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저 평면에 압축시킨듯한 그 부조 구조체인 ‘원물’들이 어떻게 그림자를 통해 보여지고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지각되고 있는가를 간신히 파악하며 단지 그것의 본래의 형태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김병주 작가는 과연 이러한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데아의 본질에서 파생된 여러 형상들을 이해하고 그것의 다양성을 탐구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에이도스들의 나타남이 연유하는 기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짐작건대 아마도 작가는 이 중간 어디쯤에서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보고 싶냐고 물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