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서울을 시작으로 열리는 E.A.T.의 회고전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은 1960년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예술가와 공학자의 협업체인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의 주요 활동을 조명하며 4차 산업혁명시대에서 나타났던 융·복합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예술과 기술의 실험을 의미하는 E.A.T.는 예술가와 공학자 그리고 산업 사이에 더 나은 협력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1966년 예술가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와 로버트 휘트먼(Robert Whitman), 벨 연구소의 공학자 빌리 크뤼버(Billy Kluver)와 프레드 발트하우어(Fred Waldhauer)를 중심으로 결성된 비영리단체이다.

다양한 예술적 표현과 예술적 상상력의 현실화를 갈망했던 6,000여명의 예술가와 공학자가 E.A.T.에 가입했으며, 이들은 앤디 워홀(Andy Warhol), 백남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같은 당대 최고의 현대 예술가들과 함께 교류하며 서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전시는 협업의 시대, E.A.T.의 설립, 아홉 번의 밤 : 연극과 공학, 확장된 상호작용, 총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협업의 시대 

1960년대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대였으며, 동시에 기득권층의 권위에 저항하는 반문화 운동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전까지 서로 무관했던 예술가와 공학자들이 교류하며 협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장르 간 경계를 허물고 작가들 사이의 공동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1960년대를 ‘협업의 시대’라고 한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대거 뉴욕으로 망명하면서 예술의 주무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뀌게 된다. 이 때 미술가와 무용가의 협업처럼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인 흐름 역시 미국에 전이된다.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협업하던 시기에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의 협업도 함께 이루어지게 된다.

1<뉴욕찬가>(1960)

장 팅겔리(Jean Tinguely)는 빌리 클뤼버의 기술적 협조를 얻어 스스로 움직이면서 그림을 그리고 증기를 내뿜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자멸하는 작품인 <뉴욕찬가>(1960)를 완성한다. 이 작업 이후로 팅겔리는 뉴욕 미술계에서 자리 잡았으며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다.

2<변주곡 V>(1965)

1960년대 대표적인 협업인 존 케이지(John Cage)의 <변주곡 V>(1965)는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와 함께한 작업으로, 이 작품을 통해 무용가의 안무와 상호작용하는 다중 장치와 조명, 영상 그리고 전자음을 고안했다. 커닝햄과 그의 무용단의 안무는 로버트 무그(Robert Moog)가 고안한 안테나와 클뤼버의 광전지 시스템에 의해 인지되었다.

3<은빛구름>(1966)

앤디 워홀의 <은빛 구름>(1966)은 예술가와 공학자의 아이디어 공유에서 구현된 작품이다. 샌드위치 포장용 소재로 사용되었던 은박 스카치팩을 이용하여 사각형의 풍선 모양 오브제를 만들고 그 안에 헬륨 가스를 채워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그 풍선이 갤러리 안을 자유롭게 떠다니게 한 작업이다.

E.A.T. 의 설립

1966년 9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로버트 휘트먼, 벨 연구소의 공학자 빌리 크뤼버와 프레드 발트하우어는 장르 간, 그리고 예술과 과학 간의 활발한 교류를 지원하기 위해 E.A.T.를 설립한다. 이들은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와 공학자를 모아 예술가들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공학자나 과학자를 매칭하여 기술적 도움을 제공하고 일대일 협업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E.A.T.는 가능한 많은 예술가에게 기술적 도움을 개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들은 서로간의 이해와 미적인 가치 판단을 배제한 자유로운 협업을 추구하였다.

아홉 번의 밤 : 연극과 공학
《아홉 번의 밤 : 연극과 공학은》은 E.A.T.의 활동 중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1966년에 개최된 이 이벤트를 위해 10명의 예술가와 30명의 공학자가 대규모로 협업한다. 그들은 뉴욕의 아모리에서 현재 다원 예술의 모태가 되는 융합 공연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약 10개월 동안 예술가와 공학자는 공연을 위해 사용될 기술과 장비를 개발하는데 주력한다. 10개의 퍼포먼스에서 현대 무용, 순수 미술, 미디어, 음악, 영화, 연극 등의 여러 장르를 수용하고 다차원적으로 접근하여 새로운 예술의 맥락을 시도하였다. 매번 1,500여명의 관객이 공연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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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의 밤: 연극과 공학》 공연 포스터(1966)

5<신체적인 것>(1966)

스티브 팩스턴(Steve Paxton)의 <신체적인 것>(1966)은 상호작용이 가능한 퍼포먼스로서, 그는 이 퍼포먼스를 위해 반투명한 터널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었고 관람객들은 이 구조물 내부를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 공간 안에서 관람객들은 무용수들과 만날 수 있었고 터널의 출구 밖에 달린 소형 수신기로 다양한 소리가 재생되었다. 관람객들의 행위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작업이었으며 현장의 즉흥성이 중요시되었다.

데보라 헤이(Deborah Hay)의 <솔로>(1966)는 기술자 래리 헤일로스(Larry Heilos)의 기술적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퍼포먼스로, 헤일로스는 이 공연을 위해 무선으로 조종 가능한 움직이는 소형 무대 장치 8대를 제작한다. FM 신호를 이용하여 무선으로 시스템을 조종하여 이 장치들을 공연장 안으로 이동시켰다. 흰색 의상을 입은 퍼포머들이 규칙과 안무에 따라 여러 대형을 만들고 움직이며 안무를 이어갔다.


6<솔로>(1966)

7<반도네온!>(1966)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가인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의 공연 <반도네온!>(1966)은 아코디언과 비슷한 악기인 반도네온을 개조하여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를 혼합시켰다. 여러 마이크를 반도네온 소리를 분할하는 장치와 스피커에 연결했고, 제어 시스템을 통해 무대 조명의 밝기를 조절했다. 그리고 투사식 텔레비전과 연결하여 이미지와 조명, 사운드가 제어 가능한 방식을 구축하였다. 즉, 아모리 전체는 튜더의 연주에 의해 통제될 수 있었다.

확장된 상호작용
E.A.T.의 활동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으며 예술의 확장성을 넓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이후 1970년 일본에서 개최될 오사카 만국박람회에서 펩시사의 후원을 받아 파빌리온을 기획하게 된다.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대다수의 파빌리온은 건축가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가 개발한 지오데식 돔 형태였고, 펩시 파빌리온 역시 바닥이 잘린 구형인 돔 형태로 디자인 된다. 파빌리온의 외부에는 후지코 나카야(Fujiko Nakaya)의 <안개 조각 #47773>이 설치되었고, 로버트 브리어(Robert Breer)의 움직이는 조형물인 <떠다니는 것들>(1970)이 분당 60cm의 속도로 1.8m가 넘는 파빌리온의 외부를 회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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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시 파빌리온을 회전하는 <떠다니는 것들>(1970)9파빌리온 주변에서 나오는 <안개 조각#47773>(1970)

파빌리온 돔 내부는 거울로 가득 채워졌으며, 파빌리온에 입장하는 관람객은 거울에 반사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파빌리온의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야했다. 돔 천장을 뒤덮은 거울에 반사되는 자신들의 모습과 내부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홀로그램 영상, 사운드로 인해 관객들은 이전에 체험해본 적 없는 공감각적 환경에 몰입할 수 있었다. 즉, 관람객은 단순한 감상자를 넘어선 참여자가 될 수 있었다.


10파빌리온 돔 내부

E.A.T.는 파빌리온을 엑스포 기간 동안 예술가들의 실험실로 쓰일 수 있도록 개방했다. 다년간의 협업을 통해 완성된 펩시 파빌리온은 ‘실험의 종합무대로서, 기술이라는 몸체에 예술적인 혼을 불어넣을 기회’를 제공했다.

E.A,T.의 활동은 1970년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현대에 와서는 ‘융합’이라는 단어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1960년대 그들의 시도는 파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의 프로젝트가 기술적, 재정적 문제로 상당수 무산되었다고 할지라도 예술가들과 공학자들의 협업을 선구적으로 이끌어내며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표현의 도구를 만들어주고, 공학자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보여줌으로써 예술의 확장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들의 활동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준다.
(작품의 설명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간한 전시 도록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editor 장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