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을 껴안는 세계 : 전현선 <나란히 걷는 낮과 밤> (대안공간 루프)

갤러리 기체에서 이전에 열린 <몰입과 균형> 그룹전에서 필자는 작가 전현선의 작업을 “회화다운”이라는 맥락으로 분석하였다. (회화다운 회화: <몰입과 균형>) 이번에 대안 공간 루프에서 열린 이 작가의 개인전은, 사실 이전에 제시한 맥락과 또 다른 시점에서 분석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회화 작업의 전시방법이 달라, 개별 작품 간의 거리를 없애, 하나의 전체상으로 전시되었다. 이 부분에 접목하여 그의 작업을 분석한다.

3076668470_duiWt15k_016<몰입과 균형> (제공: 갤러리 기체)

꾸미기_2V6A1129<나란히 걷는 낮과 밤> (제공: 대안공간 루프)

멀리서 보면 커다란 캔버스 하나로 보이는 작품(들)은, 같은 크기 캔버스끼리 붙여져 3×5 배열로 틈새 없이 전시되었다. 갤러리 기체에서 열린 그룹전에서 각각 따로 소개된 것들이 이번 전시에서 하나의 큰 작업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전시 방법은 물론, 작품 제목이 달라진 점도 주목할 수 있다. 그룹전 <몰입과 균형>에서 <뿔이 본 열매의 풍경 (전체를 위한 부분)> (2017) 제목으로 소개된 작품은 <나란히 걷는 낮과 밤 (11)> (2017)로 소개되었다. 여기서 <나란히 걷는 낮과 밤>은 이 커다란 전체상과 그것을 이루는 각 개별 작품들과 공통적인 이름을 갖는다. 이와 같이 ‘전체를 위한 부분’은 이번 개인전에서 ‘전체’로서 드러난다.

또 세부적으로 보았을 때, 제목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모티프(원뿔과 구, 그리고 토끼)와 표현,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같은 캔버스 크기라는 측면에서 이 커다란 작품을 시리즈의 집대성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작업이라 할지라도, 각각 작품은 자율적으로 전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잔이 아무리 강박적으로 사과를 그린다 하더라도, 오늘날 그 작품들을 하나의 캔버스로 보이게끔 연결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현선의 작품이 (만약에) 시리즈라 불리더라도 붙여서 보여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 소개된, 마치 ‘하나의 캔버스와 같은’ 작업이, 경기장에서 일사불란하게 그려지는 카드섹션처럼 ‘전체상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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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전현선의 이번 작업은 연결되었을까—바꾸어 말하면, 연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의 캔버스에 이미 모티프가 각각 나누어져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각 모티프들끼리 관련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그려진 위치, 즉 레이어가 서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각 모티프들은 말풍선과 같은 공간, 혹은 잘라낸 것과 같은 배경 위에 그려지거나 캔버스 안에 새로 구획된 위치로서 또 다른 캔버스에 그려진다. <몰입과 균형>전에서 필자가 분석한 내용에서 보면, 그러한 구획은 ‘회화로서 그려진 캔버스’가 된다. 말하자면, 그림이 ‘그려지는’ 캔버스라는 토대마저 표현의 대상이 되었다. 이번 작업 또한 하나의 캔버스 안에 여러 공간이 생겨, 그 안에 여러 모티프들이 그려져 희한하게 만난다.

이처럼 <나란히 걷는 낮과 밤>은 제목과 같이 각각 마주할 수 없는 조합이 그려진다. 이번 작품에서 낮과 밤이라는 키워드는 대립하는 개념이 시간대 구별을 애매하게 하지 않으면서 보조를 맞춘다. 인물 옆에 동물, 그리고 그것들이 ‘그려졌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연출된 지지체’가 함께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밤에 내가 잠들었을 때, 내가 모르는 지구반대편에서 어떤 사람이 아침을 맞이하는, 일종의 ‘세계’를 평면으로 창출하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콜라쥬 작품이 캔버스 하나만의 영역으로 국한되는 것과 달리, 외연적으로 확장되어, 다름과 함께 하는 가능성이다. 계속되는 깊이감의 창출은, 회화 안에 회화, 그리고 그 옆에도 보면 회화, 그리고 … 이런 식으로 쌓여가면서 실질적인 캔버스 옆에 또 다른 캔버스가 붙여진다. 그렇지만 이 표현된 깊이감은 꼭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각 캔버스마다 레이어의 창출에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집합체로서의 커다란 캔버스 또한 분열적이다. 하나는—보다 근본적으로—화면이 나누어져 있는 것, 그리고 그 다음으로 그 표현된 레이어들이 일치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깊이감이 결국 환영에 기초하여 캔버스의 단일한 평면(성)에 귀착한다는 점에서, 분열을 껴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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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분열의 공존은 결합가능성 또한 제시해준다. 전시공간에서 <나란히 걷는 낮과 밤> 반대편에 ‘따로 떨어져’ 전시되는 작품들이 하나의 커다란 캔버스처럼 연결되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세계로서’ 껴안을 수 있는/껴안기는 가능성이다. 그것은 프레임 안쪽에 머무는 자족적인 세계가 아니라, 확장되어가면서 다름을 함께 품에 안는 세계이다. 낮과 밤이 (극과 극을 이루는)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세계 품 안에 분열적으로 안겨진다. 그것은 작가가 캔버스 안에 그릴 때의 세계가, 다수 그리고 다양하게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발휘되는 내적인 힘이다.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