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동하는 환영체 : 조경재 《부서진 모서리》

작년 12월 13일부터 올해 1월 12일까지 사루비아에서 조경재 개인전 《부서진 모서리》이 열렸다. 이 전시에서 관람자는 작품을 통해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공간감은 레이어의 생성에 따른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설치작업을 통해 단조로운 공간에 리듬을 만든다. 들어오는 입구에서 관람객은 벽돌담 너머에 있는 작품들을 하나하나를 온전하게 확인할 수 없다. 키보다 작지만 이것 때문에, 그리고 다른 설치구조 때문에 입구에서 보았을 때 가려지는 부분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확인하려면 담의 반대편에 서거나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이 공간에서 작품을 보려면, 관객들은 거기서 공간을 따라 이동하는데, 그 공간감은, 광활한 벌판에서 느끼는 막연한 공간감과 다르다. 시야를 가릴 것이 하나도 없는 공간, 그때 말하는 공간감은 방대함과 막연함에 공간감이 흡수된 상태에 의한 것이다. 그와 달리 조경재의 작업에서 우리는 황야와 다른 공간감, 즉 여러 겹—시각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으로 구성된 전시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관람자의 동선을 어느 정도 정해놓는다. 그 공간(감)은 애초부터 없는 것, 혹은 존재하지만 인식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동선은 표현의 대상자체이자 도구, 즉 ‘작품으로서’ 표현의 주체이자 ‘공간을 구획하는’ 주체가 된 작품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것은 애초에 막연함에 흡수된 공간에 구조를 만듦으로써 그곳을 재구성한다. 이때 작품은, 그것 자체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공간(감)을 재구성하는 수단이 된다. 전자는 작품의 내부, 그러니까 ‘자체적’인 성격이며, 후자는 작품의 외부, 즉 (전시)공간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다. 거기서 작업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하부구조(전시공간과 가벽, 와이어)와 작업의 경계는 스며들듯이 융화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수단이자 동시에 작품임의 성격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공간에서 작가는 내부구조에 ‘수평으로’ 나란히 작품을 거는/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에 ‘수직으로 맞서’ 전시공간을 구획한다. 이 때문에 그 공간은 상당히 역동적으로 나타난다. 작품 자체가 역동적이라기보다는, 작품을 통해서 그 공간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있다. 구조를 따라 빈 공간을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빈 공간에 구조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공간감을 훑어보게 만든다.

관객들은 작품 자체이자 전시공간을 재구성하는 대상을 보고 공간감을 경험한다. 그 공간감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만드는데, 이때 관객들은 그 공간에서 은폐된/가려진 부분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 커다란 가벽과 같은 구조는 위에서 보았을 때, 벽면에 수평이 아닌 각을 지어 설치된다. 그 때문에 마치 미로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그 너머에 무엇이 보이는지—일부분이 보이는 경우는 단서로서 주어지며—예측할 수밖에 없다. 그 보이지 않는 부분은 과연 어떤 모습인지 한눈에, 그리고 한곳에서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획된 구조만큼 그 공간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작품으로 다가갈 때 느끼는 기대와 다르다. 열린 공간에서 저 멀리 보이는 작품이, 가까이 다가가서 볼 때 선명하게 보이는 것과 달리, 조경재의 작업은 보이지 않다는 사실이 작품에 조건 지어져 있다. 말하자면 아무리 다가가 보았자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영역이 있다. 보려고 하나 그 구조에 방해되어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제 눈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불가침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 영역이 계속 존재하기 때문에, 관람자는 기대감을 갖지만 끝까지 자기 손안으로 쥘 수 없다.조경재 이때 말하는 ‘불가침의 영역’이란, 물리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자, 또 다른 한편으로 개념적인, 즉 작품의 감상방식에 대한 내용이다. 줄로 그어지고 벽돌로 차단된 공간 때문에, 그 뒤에 제작된 물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일이 힘들다. 사진을 같은 방식으로 바닥에 붙여놓은 경우, 줄이 사선으로 그어졌을 때, 그 공간은 마치 출입금지 선과 같이 차단되어 들어가기 힘들다. 이는 신체가 작품이 놓인 공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말하자면 물리적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작품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보여주면서 관람자에게 긴장감을 부추긴다. 이때 (공간적으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관람자의 인식은, 내가 들어가서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숨겨놓은 공간처럼 몇 가지 오브제는 전시되어 있는데, 그 작품을 제 눈으로 보려고 하니, 벽을 허물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하지만 그러려면 작품을 물리적으로 파괴해야만 하는, 즉 작품에 손을 대지 말라는 금기와 작품을 ‘그 모습을 온전히’ 보관해야 한다는 상식 사이 갈등이 생긴다. 그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고,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 때, 대상은 오로지 ‘분위기’처럼 붕붕 떠 있는 것으로 관람자에게 인식된다.

이때 전시 소개 글에 나온 ‘환영체’라는 말이 한 층 더 의미를 갖는다. 전시공간을 마치 캔버스와 같이 보았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작품과의 거리를 더 이상 좁힐 수 없는 임계점, 말하자면 장애물 때문에 그 공간에 생긴 거리감 또한 환영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작품은 관객과의 거리를 계속 벌린 채, 관람객의 경험을 시각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게 한다. 이 전시공간에서 경험하는 공간감은 그 공간을 재구성했다는 점에서만 보면 활발하나, 비시각적인 영역에서는 오로지 눈동자만 활발해진다. 차단되어 그 구조 너머에 보이는 오브제, 그것을 보려 하나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두 눈만 바쁘다. 이 임계점에서 관람자가 느끼는 긴장감은, 사실 작품에 사용된 물질적인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팽팽하게 뻗은 줄, 쌓아 올려놓은 벽돌, 얇은 나무로 된 바닥은 변형될 가능성의 끈(비유적인)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상태이다. 이것들은 끊길 수도, 허물어질 수도, 그리고 철거될 가능성이 잠재된 상태로 보여준다. 이와 같이 갤러리(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공간은 재료의 임시적인 성격 때문에 더더욱 그려진 인상, 즉 ‘환영체’라는 인상이 명료해진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 공간은 사실 캔버스보다 오히려 칠판에 가깝다. 분필이 쉽게 부러지고 글자를 써도 가루가 날아가버리는 것처럼, 캔버스보다 재료와 표현의 임시성이 두드러진다. 작품을 통해 공간을 다르게 경험할 수도 있지만, 그 공간이 다시 애초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재료적 특성에서 찾으면, 전시공간에 나타난 환영체라 볼 수 있다.

작품의 감상방식에 따른, 그리고 재료로서 자체적으로 나타나는 환영체. 이 성격 때문에 작가가 독일과 서울의 건축을 비교하는 언급이 보다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이 재료들은 서울의 건축물을 보고 작가가 골랐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허물어질 듯 보이는 환영체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일면을 경험하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부수고 만들고를 빠른 기간에 반복하는 일면을, 그러니까 생겼다가 금방 사라져버릴 때 드러나는 ‘껍데기뿐이었던’ 하나의 외관=일면을 비유를 넘어 보여준다. 이때 생성과 소멸은 그야말로 약동적이다. 관람자가 작품의 구조에서 찾은 약동감, 그것은 서울의 설계와 건축을 볼 때 느끼는 약동감 못지않게 일시적이다. 구조를 만들고 또 부수는 도시의 모습은 작가가 보아온 독일의 건축과 달리 일시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없고, 오히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영체의 모습이다. 이번 전시공간에서 느끼는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작품에 손을 댈 수 없다는 일반상식 때문에 임시성에서 찾은 허무함에 일시정지를 부여하는지도 모른다.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