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 투어는 주술사 역할을 겸임한다: 정금형, <비디오 투어>

1. 미술관 가이드 투어

관광버스를 타면 가다가 가이드가 가끔씩 소개를 해준다. “여기는 어디어디이고, 옆에 보이는 것은 몇 년에 세워진 이러이러한 건축물이다.” 이러한 설명을 들을 때와 듣지 않을 때 차이는 명확하다. 아예 그냥 스쳐 버릴 수도 있고, 시야에 포착되더라도 오로지 보는 사람의 객관적인 시선에 따라 판단된다. 아무렇게 생각도 안 하거나, “뭐지?” 하다가는 이미 뒤에 물러나버린다. 반대로 가이드의 안내를 받을 때면, 그 풍경과 건축물은 우리 눈에 생생하게 보인다. 지식적인 차원, 말하자면 정보를 통해서 전달되지 않았으면, 보는 사람은 아예 그 상을 캐치조차 못하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말로 정보를 얻었을 때, 비로소 그 존재가 드러날 수 있다. 미술관/박물관의 경우 또한 유사하다. 그 전시공간에 어떠한 설명도 없으면, 관람자는 객관적인 시선에 떠맡길 수밖에 없다. 단지 ‘그 사람이 보기에’ 아름답다거나 흥미를 끄는 대상만 시야에 생생하게 들어온다.

오늘날 미술관 현장에서 도슨트의 필요성이 느껴질 이유도, 어쩌면 현대미술의 난해함, 즉 작품으로 하여금 그 스스로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박물관의 유물이 그 사물에 부여된 쓰임새와 기능을 모르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처럼, 설치, 영상, 아카이빙 등 미술의 다양한 매체는, 보는 사람에게 설명이 필요하다. 도구들은 쓰임새만 알면 어느 정도 인식이 되지만, 작품의 경우는 그것들만으로 작가의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끔씩 미술관에서 도슨트의 말을 통해서 작품의 설명을 들을 때 마치 여행하는 느낌마저 든다. 미술관 공간을 다닐 때 어떤 것이 작품인지 아닌지 모를 수 있고, (비싼) 표를 끊었는데 금방 그 코스를 나가버릴 수도 있다. 이때 관람자에게 그것들을 작품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말하자면 침묵된 작품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주는 존재가 도슨트이다.

2. 말없는 존재에 영혼을 불어넣기

이 맥락에서 보았을 때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에서 상연된 정금형의 <비디오 투어>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작가는 여기서 본인의 이전 전시와 퍼포먼스 작업, 그리고 거기에 쓰인 도구들을 찍은 영상을 보여주면서 말로 설명해준다. 작년 런던에서 소개가 된 전시장을 찍은 영상에서 퍼포먼스에 쓰인 도구들은 언뜻 보면 도대체 무엇인지 짐작을 할 수 없다. 마네킹, 드론, 진공청소기, 그리고 AED 등, 관람자는 애초에 그것들에 부여된 쓰임새/기능은 유추할 수 있지만, 그 사물들만 봐서 작품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가늠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관람자가 작품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물들에 쓰임새라는 가치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그것들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사실 진열된 도구들을 통해서만 보면 유추가 쉽지 않다. 이때 그 물건들의 가능성, 말하자면 그대로 쓰였거나 혹은 그 사용가치가 배제되었거나 하는 ‘작품(에 있어서/속)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시각적으로만 보여줄 때 이 가능성은 파악할 수 없고 도구들은 침묵할 뿐이다. 이 상황에서 그 물건들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 일종의 힘을 얻는다. 당연히 그 쓰임새는 알지만, 작품에서 떼어나면 그것들은 장비, 기구, 혹은 도구의 사물로 인식되며, 작품 속에서 작가가 부여한 가능성을 박탈 당한다. 침묵을 강요 받은 상태, 마치 하나의 유물처럼 전시공간에 남겨진 사물들을 다시 생생하게 보여주는 활동이, 바로 이번 <비디오 투어>이다.

설명어조로 진행되는 이번 작업은, 작가의 이전 작업을 아는 사람이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기계나 장비를 구사하면서 진동(감)을 보여주고 작가가 몸소 경험하던 작업과 비교하면, 영상을 보여주면서 담담하게 설명하는 모습은 상당히 정적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전 작업을 보여주면서 이번 작업 또한 ‘맥박 부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 영상 속에 나오는 이전 작업과 도구들을 보면, 마네킹을 비롯하여 공기를 불어넣는 기구, 전자가전 등 여러 물건이 나온다. 이것들을 가지고 혹은 이것들을 통해 작가는 물건들에 생명(감)을 불어넣는다. 퍼포먼스를 할 때, 작가는 마치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가짜 인간 형태를 움직이고, 스위치를 켜서 마치 생명을 받은 것처럼 도구들이 움직인다. 뿐만 아니라 풍선에 공기가 들어갈 때는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작가의 동작—계속 펌프를 누르거나, 기구를 사용하여 입김을 불어넣는—을 따라서 풍선이 부풀어오르거나 움직인다. 이때 작가가 하는 일은 사물을 움직이고 형태를 부여하는 주술사에 가깝다. 죽어 있는 모습으로 작가와 함께 있던 물건들에, 작가는 직접적인 방식과 간접적인 방식—전자는 공기를 불어넣고, 그리고 후자는 전원 스위치를 켬으로써—을 통해 영혼을 불어넣는다.

여기서 왜 ‘이미지’나 ‘영상’, 혹은 ‘무비’도 ‘동영상’도 아닌, <‘비디오’ 투어>라 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하나의 구시대적인 유물로서, 비디오라는 표현은 물질적인 아카이빙의 성격을 짚어준다. 작가가 보여주는 영상에서 관람객은 그 정보를 알지 못하는 이상, 사실 실제로 진행된 퍼포먼스인지 아니면 화재대피훈련인지, 그리고 소장된 물건들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 쓰였는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보다 궁극적으로는 지금 작가가 보여주는 기록물이 도대체 무엇인지, 혹은 영상에 나오는 물건들이 애초부터 침묵된 것인지 작품 속에서 (그 기능을 따라) 살아났었는지 작가의 말을 듣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비디오라는 말로 설명되는 작품과 도구들의 영상, 이것들은 <비디오 투어>에서 작가의 말을 통해서 다시금 생기를 얻는다. 이전에 했던 작업이나 그때 쓰인 결과물의 저장된 기록, 바로 침묵 당한 존재에게 말로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로 존재한다.

3. 관객들의 비상사태?

사실 화면 안에 가끔씩 보이는 컴퓨터 폴더 속 여러 영상뿐만 아니라, 화면을 마주 보는 관객 또한 영혼이 주입된다. 영상 시작과 중간에서 작가는 관객들에게 화재시의 대피안내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와 비슷하게 소개한다. 이 담담한 어조와 이전 작업과 도구들을 설명할 때의 어조는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관람객은, 마치 작가가 마네킹에게 재활 트레이닝을 시키는 것과 같이, 혹은 스위치를 눌러 몸도 진동을 느끼는 것과 같이 거기에서 생기를 얻는다. 물론 관객과 사물은 다르다. 스위치를 누르거나 설명을 해줌으로써 사물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과 달리, 사람은 그 스스로 생생하다. 그럼에도 어두운 공간에 앉아 가만히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비상시 대처 안내를 설명해주어야 활동적일 수 있다. 관객들은 단지 영상만 보는 줄 알다가 소화기의 위치를 실제로 확인하고 출입문 쪽을 바라본다. 영상과 설명의 정적인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관객은 왠지 긴장을 탄다. 어쩌면 ‘시어터에서’ 침잠할 수 없는 이 관객들의 모습이, 일반을 벗어난 비상사태일 수도 있다. 작업이 끝났는데 마지막까지 출입구 안내를 설명어조로 듣는 관객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의식의 방향을 조정 당한다.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말없는 사물들에게, 그리고 침묵하는 관객들에게 일종의 생명감을 말로 불어넣어준다.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