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가와는 흐른다 : 남화연 <임진가와>

노래는 흐른다. 이 표현은 노래의 성격을 잘 짚어준다.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아 노래는 불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또 시대와 나라를 넘나든다. 어느 한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전달되는 노래는 때때로 일치하지 않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고향의 부재가 아니라 시공간의 초월이라 볼 수 있다. 노래가 유행하였던 그때 그 시기에 내가 거기에 없었다 하더라도 노래를 들을 때 그 시대에 대한 동경이 생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바라보았을 때, 마치 강물의 하류에서 상류를 올려다보듯 그때 거기에 노래가 들리고 불리던 시절을 그리워할 줄 안다. 이처럼 노래는 다른 곳으로 위치를 옮겨가는데 이때 원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자주 있다. 음정이나 가사가 조금씩 변할 수 있고 그 내용자체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전달의 과정과 노래자체의 변화, 이런 특징들을 짚어볼 때 노래는 ‘흐른다’라는 표현이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이번 시청각에서 열린 남화연 전시 《임진가와》도 여러 면에서 ‘흐르는’ 전시였다. 이 특징은 크게 내용과 전시의 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일본에서 유행을 탄 노래 ‘이무진가와(イムジン川)’에 주목하였다. 1960년대 말에 밴드그룹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The Folk Crusaders)는 재일조선인 학교에서 들은 노래 ’림진강’을 바탕으로 번역한 가사에 한 절 더 추가하여 불러 이후 전국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 노래를 주제로 작가는 영상, 악보, 당대 자료 등 다양한 매체를 보여주고 그 주제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흐른다는 표현이 어떻게 보면 강물이라는 모티프자체, 혹은 노래자체의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면 노래의 변용, 그리고 그 과정에 주목하여 시각적으로 풀어낸 전시의 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전시의 구성 면에서 보았을 때 작가는 영상을 중심으로 그것과 연관된 여러 모티프를 다른 매체로 보여준다. 여러 공간으로 구성된 전시장을 활용하여 입구에 일본어 가사로 된 악보, 그리고 들어가서 오른쪽에 보이는 공간에 이무진가와에 대한 리서치를 포함시킨, 다큐멘터리처럼 제작된 영상이 있다. 이 영상에서 나온 자료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즉 일종의 변화과정을 거쳐—그 반대편 공간에 전시되었다. 전시공간에서 작가의 드로잉, 신문기사, 그리고 여러 버전의 가사를 찾을 수 있는데 일본어 발음을 따라 적은 가사와 번역된 가사, 그리고 원래 가사가 실린 악보를 입구에서 가져간 악보와 (일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특히나) 대조하여 감상해볼 수 있다. 이처럼 전시의 구성, 그리고 악보의 변이를 언어적으로 대조해볼 수 있는 점에서 이 전시는 어떤 대상의 변화, 그 ‘흐르는 성격’을 잘 짚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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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2_144143한편으로 작가는 그러면서도 ‘흐르는 존재’를 잘 ‘포착’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이무진가와를 다른 전시 공간과 스크린 위에서 정박시키고 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영상을 스크린에 고정시켰고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영상에 나오는 노래의 탄생(즉 원곡의 변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상은 다큐멘터리 형식에 가까운데 이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일본에서 인터뷰를 통해 수록되었다. 영상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역사적인 사실과 사적인 기억이 서로 맞물리면서 언급된다. 이 노래는 밴드그룹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에 의해 인기를 끌었다가 1968년 도작으로 판단되어 판매금지가 되어 이후 방송금지 된다. (그러다가 2002년이 돼야 재판매가 되기 시작한다.) 사회배경을 언급하면서 그 한편으로 개개인이 노래에 갖는 인상이나 기억도 이야기한다. 처음에 멜로디를 들었을 때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거나 신주쿠 포크송 게릴라 집회가 열린 당시 모습을 떠올리면서 설명한다. 그런데 이때 대부분 개인적 기억은 그 배후에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에 무의식적으로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멜로디가 처음에 들린 장소가 바로 재일조선인 학교이다. 영상에 나오는 배경을 보면 우리는 설명이 추가되지 않는 한 화면에 나오는 건물을 재일교포가 다니는 학교로 인식하지 못한다. 한자로 ‘조선학교’라 쓰여진 단서를 통해서만 그리고 인터뷰 받는 사람의 설명과 매칭이 되어야 비로소 관람자는 이 노래가 제작된 배경에 좀 더 커다란 이슈, 말하자면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고향을 떠난 존재들을 알게 된다. 광대한 사회적 배경은 영상에서 등장하는 사람들 내면에 은밀한 사이에 깊이 관여한다. 그리고 영상 또한 그 배후의 존재들을 설명 어조로 보여주지 않고 불투명하게 보여준다. 이 작업은 단지 노래에 대한 변화만 다루지는 않는다. 마치 영상에 나온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노래의 주변부, 말하자면 사회적 상황이나 역사적인 사실의 존재를—마치 그렇게 개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영상에서 ‘은밀하게만’ 보여준다. 이 영향관계는 사실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작업 태도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고 기술하는데 이는 멜로디를 처음 들었을 때 이 노래 배후에 존재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관심이 생긴 것은 아니다. 작가는 듣고 애틋함이나 노래의 어떤 분위기를 듣다가 이 노래를 둘러싼 사회적 이슈나 보다 근본적인 역사적 관계에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은밀하게만 작가에게 전달된 역사적 내용, 그것은 노래보다 앞서 존재하지만 어쩌면 노래가 앞서야만 그 사실에 접근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서 작가는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와 같은 방식으로 노래를 받아들여 변형한다. 전시 《임진가와》는 어쩌면 작가 남화연과 이 밴드 그룹을 같은 위치에 올린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노래가 들리고 매혹을 받아 변형을 거쳐 보여주기, 이 방식을 밴드(작사)와 작가가 공유하고 있다. 영상에서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처음에 한국어로, 그리고 엔딩 부분에 일본어로 불린다. 원곡이 남성 가수의 목소리로 불린다면 작가가 사용한 음원은 여가수의 목소리로 바꾸어서 불린다. 이 부분에서 가끔씩 한국어 발음이 들려 단순히 일본사람이 부르는 음원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때 말하는 일본사람이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킬 수 있을까?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사실 이런 정의(하기)자체가 어쩌면 정박을 사전에 거부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엔딩에서 변형되는 것(혹은 자체)을 통해 불린 노래를 가지고 온다. 더 나아가 작가는 그럼으로써 마이니치 신문에 게재된 ‘도작’의 문제에 도전한다. 조선총련에 의해 도작으로 간주된 임진강 노래는 판매금지가 되어 당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 주목하여 조사한 결과를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서—어쩌면 하나의 도작이라 볼 수도 있는—여러 버전으로 ‘변용’시켜 보여준다. 일본어로 불린 노래, 일본어 발음으로 적은 가사, 그리고 림진강과 이무진가와의 가사는 서로 연결고리로 묶이면서 변형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보면 포크 게릴라 집회에서 젊은이들이 이 노래를 불러 단결시킨 노래가 거의 50년 지나간 해에 한 한국인 작가를 매혹시켜 작업의 주 소재가 되는데 이 또한 하나의 전달과 변형의 과정이다. 원래 한국어 가사로 된 노래가 일본에서 사랑을 받는 과정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 주제를 전시장에서 여러 변형을 보여주는 것은—신주쿠에서 열린 게릴라 집회의 성격과 비슷하나 그것보다 좀 더 소소한—저항으로 읽을 수 있다. 흐르는 강물을 나무판으로 나누어 서로 밀고 막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모습 그대로 표현하기, 그러니만큼 전시 제목도 ‘림진강’과 ‘이무진가와’도 아닌, 변형 상태인 ‘임진가와’이다.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