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미술 아닌 것(?)-3] 폐기 또는 쓰레기

1. 쓰레기는 쓰레기

팀 노블과 수 웹스터(Tim Noble & Sue Webster)의 <NASTY PIECES OF WORK>(2008–09)(사진)을 보면 조명 아래 쓰레기로 만들어진 오브제가 있고 그 뒤에 마치 인간의 모습과 같이 그림자가 늘어선다. 이때 관람자는, 가상(그림자)만을 보면 진실(쓰레기)을 모를 수 있다는 식으로 이 작품을 일반적으로 풀 수 있다. 그와 약간 다른 방식으로 보면, 그들의 작업은 어떤 무대를 보는 것 같다. 조명이 꺼지면 전시장에 쓰레기의 산더미만 보이며, 이것을 보고 작품으로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그 재료에 내재된 뜻—사회정치적이거나 개념적인 의미— 때문이거나, 혹은 보다 궁극적으로 큐레이팅으로 전시공간에 놓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쓰레기는, 전시공간으로 들어오면서 가치를 새로 부여 받는, 말하자면 뒤샹의 소변기가 미술관 좌대 위에 올려진 것과 다르다. 노블과 웹스터의 작업에서 쓰레기는 그 자리에서 미화되지 않고 그림자로서만 미화된다. 그들은 쓰레기를 쓰레기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림자의 아름다운 차원을 조명의 유무에 맡기고 있다. 조명을 끄면 남는 것은 더러운 잔해들이고 그것들로부터 내러티브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별 유의미하지 않다. 그들의 작업은 조명으로 연출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서 무대 위의 인물 본인에 작품의 내러티브가 끼어들어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2. 폐기를 보여주다

크리스토와 잔느-클로드, <Wrapped Museum of Contemporary Art, Chicago>, (1968-69)

반면 어떤 작업의 경우, 작가 혹은 그 공간에 내포된 내러티브를 단서로서만 보여주고, 동시에—특히나 바로 뒤에 소개할 크리스토와 잔느-클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의 작업의 경우 ‘물리적으로도’—불가침의 대상으로 보여준다. 일찍이 크리스토와 잔느 클로드는 미술관을 천으로 포장해서 바깥에서 못 보이게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이 예술가는 미술관의 내부 환경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미술관의 제도적 공간을 통계로 보여주거나 사진을 찍고 전시장 외부에서 설치하지도 않는다. 단지 건물과 그 내부를 감쌌을 뿐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데, 오히려 모든 것을 감싸버렸기 때문에 그 내부를 가시화 해준다. 여기서 그들은 단서적으로 미술관의 존재를 보여준다. 미술관을 핥듯 살펴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의 기능을 천으로 무효화, 즉 폐기시켜버렸기 때문에 그 기능을 부각시켜준다.

이것은 양혜규의 <창고피스>(2004)에서 포장지를 뜯고 밑의 팔레트를 빼내놓으면 ‘창고’라는 명칭을 더 이상 붙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업은 예술가가 작품 제작과 소장에 겪는 어려움이 작업으로 나타난 경우이다. 작품은 일반적으로 전시공간과 창고를 오가며 소장된 가치와 전시되는 가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양혜규의 이 작업은 ‘전시장’에 ‘소장된 것’으로서 소개가 된다. 그것은 사이먼 스탈링(Simon Starling)이 헛간을 배로 변용시킨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스탈링이 보여준 <Shedboatshed(Mobile Architecture No. 2)>(2005)의 경우가 미술관 외부에서 이루어지고 그 결과물로서 전시장으로 들어왔다면, 양혜규의 경우는 작품에 주어지는 위치/장소와 가치가 전시장과 작업실 혹은 창고 사이를 오가면서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양혜규, <창고피스>(2004)

사이먼 스탈링, <Shedboatshed(Mobile Architecture No. 2)>(2005)

3. 쓰임새를 부여하기, 망각하기, 되찾기

시타미치 모토유키, 쿠로베 시 미술관 전시장면시타미치 모토유키, 쿠로베 시 미술관 전시장면 (2016)

시타미치 모토유키(Shitamichi Motoyuki)의 <새로운 석기>(2016)는 하나의 물건의 가치가 전이되는 것을 예측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해변에서 주운 돌멩이를 간석기와 함께 2016년 쿠로베 시 미술관(Kurobe City Art Museum)에서 전시하였다. 쓰임이 정해져 있지 않은 돌멩이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유한 하나의 잠정 상태에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돌로 작품을 만들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기념품으로 방에 갖다 놓고, 또 어떤 사람은 다시 해변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다. 이 모든 결과를 결정하는 주체는 구매한 사람이다. 미래에 간석기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돌멩이와 달리 원래 기능이 부여되어 만들어진 물건의 경우는 기능이 억제되는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 즐겨 입은 옷을 더 이상 안 입게 될 때, 옷에 부여된 기능을 잠정적으로 억누르는 일이 된다. 언제 입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 다시 입을 것 같다는 예상은 실질적으로 옷장 속을 잡다한 것들 것 채워간다. 만약에 그 옷을 버리기 아깝다면 중고샵에 가서 의류를 팔 수 있다. 물론 구매 당시의 모습과 비교하면 상태는 다르고 오히려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중고샵에서 의류를, 그리고 중고서점에서 책을 산다. 이때, 애초부터 물건이 보유하던 가치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 가치의 변화 혹은 재획득은 물건이 낡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개념적인 변화이다. 물건의 변화—헐어지거나 찢어지거나—가 하나의 소멸로 가는 과정이면, 사용가치의 부활은 보유와 유보의 상태라 볼 수 있다. 구매자는 물건의 가치를 다시 회복시킴으로써 사용가치를 획득(보유)할 수 있고 물리적인 소멸로 흘러가는 것을 잠시 망각(유보)하게 한다.

만약에 구매자가 그 사용가치를 되찾는다면 물리적인 소멸을 잠시 잊어버리게 하는데, 이러한 유보의 상태는 사실 박물관의 구조와 비슷하다. 박물관은 물리적인 소멸이나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유리로 된 공간에 유물을 보존한다. 그렇지만 이때 물리적인 소멸뿐만 아니라 쓰임새 또한 억제되고 만다. 말하자면 쓰임새조차 망각되어버린다. 그 물건의 상태가 좋든 나쁘든 미술관은 보존함으로써 사용가치도 억누른다. 시각적인 차원으로만 사람에게 전달되는 이 구조는 사용가치 대신 사회 역사적인 가치가 중요시된다. 사용가치를 억누르는 이 상황에서 그 가치를 구해내는 방법을 보여준 사례가 취미가에서 열린 《취미관》 전시이다. 물론 컬렉션을 구입하더라도 구매자는 감상용으로 볼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양한 가치로 변용될 가능성의 첫 단계로 진입하는 길인 구매 행위를 통해서 사용가치의 망각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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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취미관 전시 (박미나)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