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미술 아닌 것(?)-1] 생활용품

그림1앤디 워홀, <두개골>, 1976

그림2무라카미 타카시 <Dragon Heads – Gold>, 2015

1.현대적 생산-제작방식

대량생산되어 유통되는 물건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다. 지금 앉아 있는 자리의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종이컵에서 시작하여 책, 가구,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는 옷, 그것들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디자인으로 그리고 같은 크기와 가격으로 다수 판매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The Factory’나 무라카미 타카시(Murakami Takashi)의 ‘Kaikai Kiki’처럼 예술작품의 생산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실크 스크린과 오브제라는 방식으로 예술작품에 복제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유일하게 만들어진 공예품이 고가로 거래되는 시대에, 이들의 작품은 대량생산되면서도 고가로 거래가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것들’에 가치가 주어지는 방식은 어떤 인쇄기법의 산물이나 오타쿠 피규어가 아닌, ‘예술작품’으로서 거래가 된다.

그림3토마스 허쉬혼, <Too Too-Much Much>, 2010

그림4 마이클 크레이그-마틴, <Inhale (Yellow)>, 2002

2.일상생활 속 과밀함

유일하게 제작된, 소위 말하는 전통적 가치를 보여주는 물건은 뮤지엄에서 전시가 될 경우에도 그 가치를 제대로 반영시키고 있다. 도자기나 술병은 각각의 위치를 띄엄띄엄 해서 소개가 된다. 이는 하나의 보여주는 방식인데, 그것들이 희귀하고 그 하나 하나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장인의 숨결이 깃든, 사람의 손으로 정성껏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뮤지엄에서 더 이상 기능을 상실한 존재들에 대한 경의로서 나타난다. 반대로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물건은 넘쳐흐른다. 옆 자판기에서 파는 콜라와 매점에서 파는 콜라가 외관뿐만 아니라 내용물도 같은 것처럼, 그리고 편의점이 말 그대로 갖가지 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물건에 둘러싸인 소비의 시대에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작업이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의 작업과 마이클 크레이그-마틴(Michael Craig-Martin)의 작업이다. 그들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건 그렇지 않건 간에, 작업에서 드러나는 것은 물건의 과잉 밀집된 상태이다. 허쉬혼의 <Too Too-Much Much>(2010)의 경우, 실내에 배치된 가구들을 거의 삼켜버리듯 캔들로 전시장, 심지어 출입구까지 뒤덮여 있고, 크레이그-마틴의 경우, 여러 물건들이 캔버스 안에 빽빽이 그려져 있다. 선대 작가 아르망(Arman)의 작업이 수집의 차원에서 소비를 보여준다면, 여기서 두 작가는 과밀함과 대량생산•소비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림5최정화, <Kabbala>, 2013

그림6카네우지 텟페이, <White Discharge (Built-up Objects/Ishinomaki) #1, #2>, 2017

3.제거된 기능성

부귀영화를 누려도 인간은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의 <대사들>(1532–1540)에 가장 잘 드러나듯이, 차려 입은 두 남성 앞에 왜상으로 그려진 해골이 있다. 오늘날에는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소비에서 손을 뗄 수 없다. 대량생산되어 값싼 가격에 팔리는 물건은 소비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시키게 되었다. 최정화의 작업에서 쓰이는 대량생산된 바구니는 사치의 문제를 떠나서 사람과 소비의 관계를 보여준다. 눈높이보다 높게 쌓아 올린 바구니는 그것이 바구니란 것을 알게 되면 하나의 일상생활을 상징하는 기념비처럼 보인다.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바구니가 그렇듯이 저렴한 가격으로 팔리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빠르게 전달된다. 이제는 고급문화 취향을 지향하지 않고도, ‘소비라는 개념 자체’에 죽음의 모티프가 기입된다. 한편 카네우지 텟페이(Kaneuji Teppei)의 작업에서 여러 물건들이 조합된 모습을 간신히 찾을 수 있다. 조합된 오브제 위에서 하얀 석고가 퍼부어지면서 그 하나하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데, 이처럼 기능을 상실한 물건들이 카네우지와 최정화, 그리고 오늘날의 박물관에서 공통적으로 소개가 된다. 그런데 고고학적 유물이 박물관 안에 들어오면서 기능을 상실하는 것과 달리, 예술작품에서 작가는 그것들의 기능을 상실시키면서 작품으로 만든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작품은 스스로 지금 그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기여하는 존재가 된다. 카네우지의 작업에서 어느 순간 보이게 되는 죽음의 모티프는 오늘날의 값싼 소비 문화 속에 허무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림7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그림8카네우지 텟페이, <White Discharge (Built-up Objects/Ishinomaki) #1, #2>, 2017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