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투명한 벽, 취미가의 쇼 윈도우

1.투명한 벽 너머: 쓸모 없음과 새로운 가치

박물관에 가 보면 많은 물품들이 그 공간에 소개된다. 옛날에 실제로 쓰이던 그릇이나 장식품을 보고 관람객은 신기해하고 과거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한다. 그리고 물품 옆에 있는 설명문을 보고 그것이 언제, 어떤 의도로, 그리고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연구자들에 의해 유추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물품은 유리창 이쪽에서 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그 쓰임새를 어느 정도 짐작 및 파악할 수 있다. 더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이제는 역사의 ‘기록물로서’ 가치를 지니고 우리가 그 ‘쓰임새’에 다가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 물건은 실용적인 가치를 잃고 대신 역사적 가치를 부여 받는다. 여기서 관람객과 물품 사이에 하나의 투명한 벽—이 말은 실질적인 동시에 비유로도 적용되는—이 존재한다. 박물관의 경우, 관람객은 이중적으로 그 물건에 다가갈 수 없다.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고, 이미 그 쓰임새에 맞게 쓸 수가 없는 두 가지 접근 불가능성이다. 이때 관람객은 진정 ‘관람객’이 된다. 보기만을 허락 받고, 소유도 사용도 금기시된 채 그 물건에 부여된 새로운 가치를 그들은 ‘본다.’

이는 미술관에도 해당된다. ‘손대지 마세요’와 ‘눈으로만 봐주세요’라는 문구와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바닥에 그려진 하얀 선이 작품과 관람객의 거리를 만든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미술작품의 경우, 실용성을 거부당하는 경우가 훨씬 드물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은 그 자리에서 실용성을 제외시켰다기보다는 다른 미술사적 혹은 미적 가치를 부여 받았다. 말하자면 애초부터 실용성을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림2압축과 팽창(CO/EX)

2.유리문 깨부수기

그 거리를 없애는, 그 투명한 벽을 없애는 방법이 굳이 (문자 그대로) 파괴 행위가 아니어도 된다. 건드릴 수 없는 물건에 부여된 가치가 돈으로 교환 가능하며 소유가 가능한 상황이 될 때, 그 투명한 유리는 열린다. 그것이 바로 상품이 진열된 쇼 윈도우이다. 취미가에서 열린 전시 《취미관》은 30명을 넘는 작가의 여러 작업이 진열장에 소개된다.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엄숙한 미술관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호비샵과 같은 분위기이다. 박다함의 음악을 틀어놓고, 격식 차린 옷을 입은 지킴이가 아니라 매장 직원들이 돌아다니는 공간에 유리로 된 쇼 케이스/쇼 윈도우가 있고 그 안에 작품이 진열되어 있다. 크기가 다양한 엄유정의 드로잉이나 압축과 팽창(CO/EX)이 전시 《허니 앤 팁》에서 보여준 사진(을 가지고 한) 작업, 그리고 최하늘의 오브제, 그 외에도 다양한 작업이 소개된다.

그림3권오상

그림4홍승혜

그것들은 가치가 있기에 소중히 디스플레이가 되어 있는데, 이는 박물관/미술관과 마찬가지다. 다만 어떤 가치를 거기서 찾느냐에 차이가 있다. 진열된 것들은 작가의 수집품, 작업, 그리고 그 모티프를 가지고 제작한, 실용성 있는 생활용품의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권오상의 자동차를 장난감으로 갖고 노는 것은 어렵지만, 홍승혜의 디자인한 시계나 공책은 사서 쓸 수 있다. 이것들 작업의 경우는 전자는 실용적인 물건에서 예술작품으로, 그리고 후자는 예술작품에서 실용적인 물건으로 이행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실용성과 예술작품을 통합하는 각기 다른 과정일 뿐이다. 이에 다른 맥락이 하나 추가가 된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수집품의 경우이다. 실용성을 지니는 물건이 작품의 소재/구성요소가 되는 경우와 수집품은 거기서 시각적으로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박미나의 필통과 잭슨 홍의 농구공을 보고 작업인지, 작업의 일부인지, 아니면 작가의 개인적인 취미생활인지 알아볼 수 없다.

《취미관》에서 진열된 것들은 다양한 가치를 시각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소유의 행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애초부터 다양한 가치를 찾아내는 방법이 아니라, 소유하기를 통해 가치를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열된 수집품, 작업, 그리고 디자인된 생활용품은 각각 다양한 가치를 지니지만 진열장 안에서 동등하게 접근불가능성의 가치로서 다루어진다. 그 상황을 극복하려면 소유를 통해 가치가 복원되어야만 한다.

그림5KPS, 박미나

그림6잭슨 홍

그림7“박미나 작가는 필통 컬렉션을 선보입니다” 

그림8
“잭슨 홍 작가는 과거 전시에서 선보였던 작업의 일부를 판매합니다.”

 

 3.기다렸지?

한때 쓰이던 물건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부여하는 것이 박물관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예술가의 작업이 제프 쿤스(Jeff Koons)의 <New Hoover Convertibles, New Shelton Wet/Drys 5-Gallon Doubledecker> (1981 – 1987)이다. 거기서 청소기는 기능을 거부당하여 유리창 안에 전시된다. 이 작품을 사는 사람은 청소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상실한 청소기, 나아가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을 사는 것이다. 박물관 유리창 안에 있는 물건은 기능의 가치보다 역사적인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되고, 미술관의 경우 어떤 예술적 가치와 미술사적인 가치를 부여 받는다. 《취미관》에서 소개가 된 ‘물건들’은 다양한 맥락을 집어삼킨 상황으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어떤 것은 작품이고, 어떤 것은 컬렉션이고, 또 어떤 것은 거실에 걸어놓기에 좋은 시계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쇼 케이스 안에 동일한 상태, 즉 전시되는 가치만을 가진 것으로 진열되는데, 이는 동시에 소유되기를 기다리는 물건이라는 잠재적인 가능성들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그것들은 일반적인 미술관의 경우와 달리, 단순한 볼거리로 ‘계속’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을 찾는 사람은 만약에 구매 의향이 있으면 그것을 사서 소유할 수 있다. 물품을 건드릴 수 없게 만든 그 유리문이, 이때 비로소 열린다.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가 되고, 여러 가치를 발견/부여 받는다는 점에서 《취미관》은 박물관이나 미술관과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수용되는지가 다르다. 단지 시각적으로 감상되는 것과 달리, ‘SOLD OUT’ 문구나 실제 그 자리에서 작품이 팔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작품에 소유가능성을 부여한 채 많은 것들—누가 사가지고 갈 줄도, 팔릴지 안 팔릴지도 모르는 작품, 작품을 사겠다는 말에 대응해주는 직원들—이 대기 상태 하에 있다.

이제 수용의 형태가 소유와 직결되면서 작품은 건드릴 수 있게 된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이야기하는 ‘세속화’, 즉 미술관, 그 유리문 안에서 거부당한 사용하기의 가능성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 가능성, 즉 공간에 진열된 작품이 ‘지니는’ 다양한 가치를 돌려받기 위해 소유하기의 행위가 필요하다. 이때 윤향로 작품에 나오는 “기다렸지?”라는 말이 훨씬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거기서 작품은 실용성을 획득하고 어떤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기다렸지?”

그림9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