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의 <위대한 조련사>와 시선의 불안정성

이번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해외 초청작으로 상연된 안무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Dimitris Papaioannou)의 <위대한 조련사(The Great Tamer)>(2017)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Nowhere>(2009)이나 <Inside>(2011)처럼 필자가 아는 파파이아누의 작품은 세팅의 규모가 크고 장대하다. 여기서 장대하다는 말은 곧 장식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장식적인 것과 거리를 둔 단순한 형식 그리고 색상을 지닌다. 무용수 또한, 많은 사람들이 머스 커닝엄(Merce Cunningham)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만큼 단순한 의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장대한 주변요소에 압도당하지도 않은 채 몸을 움직이며, 오히려 시각적으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한쪽만 비스듬히 올라온 무대에 장식적이지 않은—중간에 드레스와 우주복을 입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것 역시 눈에 띄지 않은 색조에 장식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무용수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업과의 공통점을 살펴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 작업에 등장한 안무의 모티프 또한 찾아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분절된 몸으로 마치 마술을 보여주듯이 한 인간의 몸을 만들거나(<Primal Matter> (2012) 기하학적 모양으로 된 장치 위를 걷는 점(<Birthplace>2004)에서 그렇다.

이번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그 불안정함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가 있다. 우선 첫째로 도구 및 무대의 불안정함, 두 번째로 시간의 불안정함,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시선의 불안정함이다. 비스듬히 올라간, 어떻게 보면 언덕으로 보이는 무대 위에서 무용수는 뒤로 걷거나, 여러 명으로 한 사람을 밑에서 들거나, 심지어 그렇게 불안정한 위치에서 지구 형태를 한 공 위에 곡예사처럼 올라타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의 불안정함에 대해서는 먼저 각각 펼쳐지는 장면이 스토리로서 인식되기 어렵다는 점이 있다. 절정이 어느 장면인지, 소설에서 이야기되는 그 부분에 해당되는 것을 관객들이 찾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사실 공연장으로 입장하면서 관객은 이미 작품에 참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공연장에 입장하면서 이미 무대 위에 사람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일어나서 옷을 입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입구에서 계속 들어오는 사이에 무대에서 어떤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무대는 작품의 틀을 규정하는 액자 역할을 하는 커튼이, 이미 올라 있는 상태이며, 작품의 틀이 관객이 공연장으로 입장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불안정함의 두 가지 특징은 다른 무대작품에도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Numen / For Use의 무대 설치나 안드레아스 크리겐버그(Andreas Kriegenburg)의 작업에 그 규모가 커진 것을 볼 수 있고, 곡예사적인 불안정함은 이미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이나 엘리자베스 스트렙(Elizabeth Streb)의 작업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파파이오아누의 작업에서 주목해 볼 지점은 세 번째가 되는 시선의 불안정성이다. 몸을 움직이는 무용의 범주에서 어떻게 시선이 표현되느냐면, <위대한 조련사>에서 처음에 바닥에 누워 있던 인물이 일어나고서는 관객 ‘쪽’을 바라본다. 관객을 바라보는 것인지 모호하기에 관객 쪽을 보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잘 맞는 것이다. 등장하는 무용수가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은, 관객의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무엇이 무대 위에 일어나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생각으로 변한다. 자크 라깡(Jacques-Marie-Émile Lacan)이 허상을 통해 자신(자아)을 인식한다고 하였다면, 무대 위에서 주인공은 동일시하는 대상조차 찾지 못하는, 불안에 떨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선은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정함뿐만 아니라, 무대의 불안정성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가운데에서 주인공이 춤을 추는 일반적인 발레와는 달리, 현대무용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장면이 등장한다. 무대 위에 각각 다른 요소가 공존한다는 점은 파파이오아누뿐만 아니라 다른 안무가의 작업에서도 확인이 된다. 예를 들어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의 <Impressing the Czar>(1988)에서 한 공간에 여러 무용수가 각각 다른 장면을 만들고 또 거기서 서로 유동적으로 어울렸다가 합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위대한 조련사>도 이러한 특징을 갖는데, 여기서 포사이스의 작업과 달리 특징적인 것은 무대 위에서 무용수들이 다른 무용수에게 시선을 던진다는 점이다. 즉 무대 위의 무용수들 사이에 대상과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마치 참견이라도 하듯이 몇 분, 아니 몇 초 전까지 몸을 움직이던 무용수가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무용수를 쳐다본다. 이는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호두까기 인형>에서 즐겁게 모두가 춤을 추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달리, 스태프처럼 입은 옷과 그 색상 때문에 파파이오아누 무대에서 한층 보는 자로서 기능한다. 공모된 약속을 지키고 출연자, 심지어는 무대 뒤에 있는 스태프까지 동원해서 다같이 무대 위에서 환영을 만드는 전통은 파파이오아누의 작업에서 무대 위에서 갑자기 깨지게 된다.

<참고자료>
http://www.dimitrispapaioannou.com/en/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