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또 다른 공간 : 양혜규의 영상작업 3부작에 나타나는 상황의 공간인식

대문사진 : <주저하는 용기> (2004) [http://ntu.ccasingapore.org/residencies/haegue-yang/]

사람마다 그 공간 혹은 장소에 대한 인식은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곳의 너비나 길이를 재지 않고 보다 추상적인 것으로 그 공간을 인식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많이 있는 공간에 들어가면 불편한 느낌을 갖는 것은 그 인원수를 직접 세지 않아도 먼저 주어지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에 대해 갖는 그 느낌 혹은 분위기는 말 그대로 추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추상적’ 인식은 그 공간에 대한 회고적인 인상을 다른 공간을 통해 부여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러한 인식은 낯선 공간에 어떤 친근감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때 그 공간에서 생겨난 인상은 그 공간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도 애초의 공간을 생각나게 한다.

공공장소에서 진행되는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Krzysztof Wodiczko)의 프로젝션 작업은 실제 건축물과 개개인의 사연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 프로젝션> (1999)에서 평화기념관은 원자폭탄, 혹은 이차세계대전의 피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소이며, 그곳에 그 사건과 관련이 깊은 개개인의 가슴 아픈 기억이 프로젝션을 통해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이 작업은 장소가 갖는 상징적인 요소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기억이 서로 관련을 맺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와 달리 양혜규의 영상작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서사와 장소 간의 유동성이다.

  흔히 삼부작이라고 불리는 각각의 영상작업—<펼쳐지는 장소> (2004), <주저하는 용기> (2004), <남용된 내거티브 공간> (2006)은 공통적으로 서사와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백조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이야기는 어떤 개인의 경험담이나 소박한 진술이다. 그러한 내용은 사실 영상에서 시각적으로 들어오는 장소와 완전히 동일한 현장에서 경험한 내용이 아니다. 사건은 다른 곳에서 일어났을 수 있고, 영상이 찍힌 장소와 고백하는 사람이 경험한 내용의 무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펼쳐지는 장소> 중간에서 화자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지하철 벨 소리를 듣고 서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때 벨 소리의 유사성은 또 다른 장소에서 하나의 장소에서 경험한 일이나 내용을 회고적으로 연상시키는 단서가 된다.

  이러한 회고적인 반복은 <주저하는 용기>에서 보다 명료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세 가지 사건이 진술되는데 그 공통적인 주제는 바로 제목의 ‘주저하는 용기’이다. 이야기는 서울에서 어떤 아이가 울고 있었는데 그 아이를 내버려두었다는 진술에서 시작된다. 그와 유사한 사건이 독일, 그리고 서울에서 경험된다. 그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어야 하는 마음은 결국 그곳을 유유하게 걸어나가는 자신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반복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며 첫 사건에서 연장된 주체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사건을 통해 작가는 두 번째 경험의 자리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하고—그런데 이 유사성은 두 번째 사건이 있어야 비로소 유사성을 갖게 된다—보다 원초적인 경험에 기반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남용된 내러티브 공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총 7장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제5장에서 “서울의 오염된 공기를 그리워하는 것은 과연 단순한 타락에 불과한가?”라는 말을 통해 원초적인 것에 대한 열망으로 묘사된다. 하나의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갔을 때, 그곳에서 경험되는 것은 실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회고에서 비롯된 원초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다. 이 열망은 실제 그 공간에서 경험된 내용에서 출발하여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 작업은 서로 유사한 구성상의 요소를 갖고 있으며, 공간에 대한 인식이 일대일 대응이 아니라 하나의 느낌을 통해 다른 공간까지 퍼져나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화자가 공간과 그에 대한 인상—혹은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열망까지 이어지는—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경험에서 다른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혹은 이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장소에 대해 얻은 그러한 인상은 기시감(déjà Vu)으로 나타나거나 멜랑콜리의 모습으로 다른 장소에 나타난다. 잠잠히 있었다가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과거는 영상에서 화자와 영상 간의 불일치를 통해 관람객에게 공유된다. 요컨대 영상에 찍힌 일상적인 장면(시각 이미지)은 화자가 생각을 떠올릴 때, 그리고 지나간 이야기를 말하는 그 장소(청각적 정보)와 일치되지 않는다.

  작가의 표현은 어떤 장소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 오히려 상황에 가깝다. 과거에 겪은 상황은 분위기로 포착되면서 다른 공간에서도 그 유사성으로 애초의 경험을 다시 생각나게 해준다. 이 세 작업에서 이러한 감정이나 느낌, 말하자면 추상적인 것은 서사를 통하여 장소와 스크린에 비춰진 영상 이미지라는 구체적인 곳에 투사가 된다.

<참고자료>
양혜규, 절대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생성하는 멜랑콜리, 현실문화, 2010
MMCA필름앤비디오, <이야기의 재건 5> 아티스트 토크: 양혜규 (7월15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ヘルマン・シュミッツ, 「身体の状態感と感情」, 『現象学の根本問題』, 竹市明弘, 小川侃 訳, 晃洋書房, 1978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