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스막은 매년 3I project를 기획하여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전시를 후원하여 세상에 노출시킨다. 이는 정규교육을 통해서 걸려졌거나 배제된 부분들을 다시 예술의 영역으로 환원시켜 새로운 미학에 대 해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기 위함이다. 또한 창작자로서의 자율적 권리를 보존하고자 함이다.

2017년 3I project는 카이스트 공학자 13명과 함께 하게 되었다. 나는 큐레이터로서 그들이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작품이 만들어지고 설치가 진행되는 전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작업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는 작업을 바라볼 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작품을 ‘들여다본다’” 라고 말한다. 작가의 생각과 세계관, 그리고 그 안의 미학을 바라보며 작품을 이해한다. 이렇게 시각적, 공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통해서 얻어지는 질문들과 생각들 그 안의 철학으로 작품과 그 깊이를 평가한다. 그렇기에 작업들은 대체로 어렵고, 복잡하며, 아이러니하고, 자기 지시적인 경향을 띤다.

작품 창작 원리에 대한 고전으로 플라톤의 ‘시학’에서는 그 원리를 무언가가 있고 그것에서 느끼고 그것을 이용해 서 효과적으로 표현한다는 3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 표현을 위해서는 그것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매체를 찾고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하지만 뒤샹의 영향으로 표현의 방법 보다 그 안의 철학을 더 중시하여왔기에, 매체는 수단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이를 뉴미디어라고 분류하고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매체가 가지는 특성과 그 한계로 인해서 오히려 뉴미디어 작업들은 예술의 한 장르이면서 다른 매체 작업들과 달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고, 최첨단의 컴퓨터 아트를 지향하며 단순하고 테크놀러지를 지향한다는 인식은 컴퓨터의 발전으로 환상성과 가상성을 가속화 시켰다. 이론가 레브마노비치가 『컴퓨터 아트의 죽음』에서 언급한 ‘뒤샹 랜드’와 ‘튜링 랜드’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마련하고자 이번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미학계산』이란 전시 제목 그대로 우리는 미학을 다시금 계산해보려 하였고 이는 튜링 랜드에서 뒤샹 랜드로의 가능성을 위한 시도이다. 언제나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경험 생산의 조건을 변경시켜 생물학적, 심리적, 집단적 삶의 현존하는 패턴들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물론 그와 동시에 패턴들은 새로운 기능들로 채워진다. 그렇기에 뉴미디 어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측면을 가진다. 뉴미디어의 기술성에 대한 주목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그 안의 것들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경험과 체험의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미학계산』 전시를 실행하는 과정은 ‘무엇’보다는 ‘어떻게’에 대한 모색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의 질문에 의도에 적합한 재료인 뉴미디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쓰는 시도였고, 이를 통해서 기존의 ‘무엇’에 집중하는 창작 과정에서 생기는 비평 능력과 창작 능력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대안적 시도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예술의 문법과 그 창작 과정을 오늘날의 환경을 통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 구주희

KAIST에 개설된 뉴미디어아트 창작수업은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모두 정통 예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도전을 야기한다.

첫째로, 공학의 언어로 수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공리적인 공학·언어는 예술의 비논리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대신 우리는 예술행위의 본질을 공학·언어가 닿을수 없는 근본적 한계 영역—비선형성(Nonlinearity), 카오스(Chaos), 계산 불가능성(Incomputability), 복잡계(Complex system) 등—에 빗대어 이해하기로 했다. 수학적 사고가 더 이상 동작하지 않는 (혹은 힘을 잃어버리는) 논리의 사각지대에서 우린 역설적으로 예술의 본질과 가치를 명확히 드러낼 수 있었다.

둘째로 계산(Computation)이 창작의 주요매체가 되어야 한다. 계산은 과거 컴퓨터의 개발로부터 이미 60년 이상 예술가들의 창작매체로서 사용되어 왔으며 KAIST의 구성원들에게는 화가의 캔버스와 같이 매우 친숙한 대상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계산이 어떻게 비논리적인 예술표현의 매체로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우린 답할 필요가 있다. Fazi와 Fuller가 2016년 발표한 논문을 바탕으로 계산미학이 갖는 구성주의적 특징과 계산의 매체적 고유성에 대해 깊이 논의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수업의 공시적 의미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Lev Manovich는 1996년에 작성한 에세이에서 동시대미술(뒤샹랜드)와 계산미술 (튜링랜드)가 본질적으로 합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두 세계의 대립은 ‘기술을 바라보는 예술’이 벗어나기 힘든 두가지 환상—계산가능한 아름다움과 계산가능한 인간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기인한다. 이 수업은 기존 계산미술 수업들과 달리 기술의 중심부에서 예술을 논하였다. 이는 계산미술의 주체를 공학자와 컴퓨터 과학자들에게로 다시금 되돌리려는 시도이다.

– 이병주

출처: http://www.placem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