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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최정아 갤러리에서 전시된 김병주의 작업 <Ambiguous Wall>은 여러 건축물의 골격구조를 부조형식으로 만들어 층으로 중첩시킨 것이다. 하나의 건축물의 구조는 모눈종이 위에 그려진 설계도처럼 선으로 표현되며, 작품을 앞에서 보면 윤곽선으로 된 표현 때문에 여러 레이어로 된 건축물의 모습이 서로 겹쳐진 상태로 보인다.
  그의 작업은 형식적으로 비교할 때, 한옥을 비롯한 건축물의 구조를 선으로 표현한 서도호의 대형 설치작업을 연상시킨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로 추진된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이 그렇듯이 그의 작업은 가벼운 천으로 제작된다. 그러나 여기서 작가 김병주의 관심은 (서도호의 많은 작업과는 달리)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거나 가벼운 재료가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유동성, 떠돌아다니는—를 드러낸다기보다는 이차원과 삼차원의 구조의 모호함,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갈등에 있는 듯 보인다.
  건축물은 원래 삼차원의 구조물이다. 실제로 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는, 이차원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차원적으로 파악이 가능한데, 그것은 시각을 통해서 가능하다. 베허 부부의 사진에서 유형학적인 관심사로 포착되고, 사라 모리스(Sarah Morris)의 추상적인 표현에는 어쩌면 건축물, 특히나 모더니즘 건축처럼 단순한 형식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작업에서 건축물의 형식적 구조나 유형에 관심이 기울여졌다면, 김병주의 작업은 이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레이어를 켜켜이 쌓듯이 평면 위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다. 비록 단순하고 하나의 색깔로 칠해진 테두리가 실제로 평평할지라도, 여러 건축물의 구조는 하나의 평면 위에 평면이 아닌, 앞과 뒤가 실제로 존재하는 또 다른 ‘삼차원적’ 공간을 생성한다. 앞과 뒤에 보이는 구조는 레이어를 달리 한 채 중첩되면서 눈으로 보았을 때 단일한 평면에 통합되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로 옆에서 감상하였을 때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서 그의 작업은 이차원이면서도 동시에 삼차원이라는 순환고리에 위치한다. 이는 표현의 공간이 표면이라는 이차원에 머물던 회화를 액자라는 삼차원 공간까지 확장시키면서 그 둘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든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작업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그러나 김병주의 작업은 확실히 평면 위에서 입체를 이차원적으로 다루는 것을 통해 입체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이행과정과 그 사이에 생겨나는 갈등을 찾을 수 있다.

표

글 중간에 문단 사이 작품 중간사진 첨부

건축물의 구조를 보여주는 선행사례로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ael Whiteread)의 작업이 있다. 비어있는 공간을 가시화 또는 질량화한 그녀의 작업은, 비어있음의 충만함이라는 말로 표현 가능하다. 그런데 김병주의 작업은 충만함이 아닌, 골격만 드러냄으로써 거기에 다양한 레이어의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각적인 중첩은 어떻게 보면 이차원과 삼차원 사이의 충돌처럼 보인다. 삼차원이라는 공간을 가진 건축물은 그의 작업에서 첫 단계에서 마치 도면 스케치를 한 것과 같이 이차원이라는 평면이 된다. 그러다가 다른 건축물의 여러 구조와 겹쳐지면서 이는 다시 공간을 생산하게 된다. 말하자면 레이어의 반복으로 공간이 실제로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모눈종이 위의 평면에 기반한 이차원으로 포착된 모습으로 생성된 것이며, 실제 건축물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행되어 온 것이다. 이차원의 인식에서 삼차원의 공간으로 이행되는데, 이는 시각적인 착시현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설계도의 부조화(化)이다. 작품을 감상하면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이행되면서 생기는 부조화(discordance)이다.

<사진출처> [http://www.thepicta.com/media/1533242443469450012_2286802636]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