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원활하기만 하는 것인가?

니꼴라 부리요(Nicholas Bourriaud)의 『관계의 미학(Relational Aesthetics)』은 90년대 예술작품이 비물질적인 성격으로 등장한 것을 잘 보여준다. 퍼포먼스에 대표되는 선행사례와 관계의 미학의 범주에서 다루어지는 작품을 언급하면서, 부리요는 여기서 하나의 공동체가 생성되는, 말하자면 ‘사회적인 틈’을 제공하며 상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작품을 분석한다.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의 「적대와 관계의 미학」이 있는데, 여기서 그녀는 『관계의 미학』에서 작가들이 실현하는 마이크로 공동체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작품에 참여 못한 사람들을 배제시킨다고 본다. 즉 ‘틈’이 아니라 ‘틀’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대신 그녀는 저서 『인공지옥(Artificial Hells)』에서 현실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사례로 폴 첸(Paul Chan)을 비롯한 몇 명 작가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비숍의 주장을 통해, 부리요의 『관계의 미학』에 나오는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 관계가 열린 것이 아니라 닫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리크릿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의 작업을 그 스스로가 ‘시나리오’라 부르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파울라 앨런 갤러리(Paula Allen Gallery)에서 진행된 <무제(무료)>은 작가가 설정한 조건 하에 음식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관계는 정말 원활하게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렇기만 하지 않다. SNS를 통해 형성된 관계망에서 우리는 셰리 터클(Sherry Turkle)이 언급하는 마찰 없는(friction free)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버튼 하나를 누르면 친구신청이 가능하고, 그 친구는 실제로 만나보지 못한 사람인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친구 맺기란 원래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 응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행동은 과감과 비겁함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과감하게 버튼을 누르고, 해제 버튼을 눌러서 비겁하게 인연을 쉽게 끊는 식으로. 혹자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SNS로 연결된 관계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그것은 실제 상황에서 만나든지 SNS상에서 만나든지 간에 마찰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해결책의 차이가 존재한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해서 이메일을 보내고 채팅으로 사과문을 보내는 것은 대면하여 사과를 하는 것을 꺼려한 사람들의 좋은 도피처가 된다.
  사람들은 관계를 꾸려나갈 때,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데, 앞서 살펴본 마찰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작품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비숍의 비판에 힘을 싣는 결과로 이어진다. 티라바니자가 처음에는 전시장에 카레를 놓아두었지만,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작가가 스스로 나서서 카레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만든 시나리오를 바꾸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음식물을 제공하는 일에 마찰이 생기는 일이 드물긴 하지만, 일종의 시나리오에 따라 제작된 결과는 반갑지 않은 결과를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작품 안에서 귀결되는 상황은, 원활한 관계로서만 나타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관계의 매끈하지 못함, 혹은 형성에 지장이 동반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에 어떤 것이 있는가? 타나카 코키(田中功起)의 영상작업을 보면, 이러한 시나리오가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적용되기 어려운 상황을 보여준다. <하나의 도자기를 다섯 명의 장인이 만든다(침묵에 의한 시도)>(2013, 도판)을 보면 도자기의 제작과정에서 드러나는 의견대립을 찾아볼 수 있다. 액자구성처럼 다루어지는, 즉 타나카의 영상작업 안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도자기)작업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그 제작과정 중에 원활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작가는 대상에게 하나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하나의 과제를 부여하는 입장에 있다.
  ‘열린 관계’가 아닌, 이러한 ‘관계의 열림’은 일찍이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가 『퍼포먼스의 미학(Ästhetik des Performativen)』(2004)에서 다룬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의 분석과 나란히 놓을 수 있다. <토머스의 입술>(1975)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아브라모비치는 잔을 부수고 피를 흘리며 칼로 복부에 팬타그램을 그렸다. 이어지는 잔혹한 퍼포먼스에 작가는 관객이 들어갈 여지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작품에 관객이 관여, 즉 이 작품은 결국 그녀의 상태를 보던 관객들이 그녀를 말림으로서 끝이 났다. 그녀를 시나리오에서 벗어나게 해야 된다는 윤리적 문제(의식)와 작품에 대한 윤리적 문제(통상 작품은 “손대지 마세요”라는 금기를 가진다) 사이에서 흔들리던 이 퍼포먼스는 결과적으로 하나의 관계로 인하여 끝이 났다. 과연 아브라모비치가 원한 것은 관계의 구축이었을까? 아브라모비치의 다른 작업 마찬가지로 어떤 공동체를 실현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타나카의 작업도 매끈한 관계를 보여준다기보다는 그 과정에 생겨나는 복잡한 일면을 보여준다. 이들의 작품은 관계의 열린 상태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참고자료>

エリカ・フィッシャー=リヒテ, 『パフォーマンスの美学』, 中島裕昭 他5名(訳), 論創社, 2009, (Erika Fischer-Lichte, Ästhetik des Performativen. Suhrkamp, Frankfurt am Main 2004)
クレア・ビショップ, 『人工地獄』, 大森克彦, (訳), フィルムアート社, 2016 (Claire Bishop, Artificial Hells: Participatory Art and the Politics of Spectatorship. London: Verso, 2012)
藤田直哉, 『地域アート:美学/制度/日本』, 堀之内出版, 2016
美術手帖, コンテンポラリー・アート・プラクティス, 2016.6
니꼴라 부리요, 『관계의 미학』, 현지연 (역), 미진사, 2011
셰리 터클, 『외로워지는 사람들』, 이은주 (역), 청림출판, 2012
http://www.art-it.asia/u/admin_ed_itv/8jS5gDyPrbv6ntoGAWsM/ (리크릿 티라바니자 인터뷰)
http://www.art-it.asia/u/admin_ed_feature/BAnvpX584DjzgLydcGKN/ (타나카 코키 인터뷰)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