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찻퐁 위라세타쿤과 망령들

지난 5월 20일, 서울의 아트선재센터에서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을 초청하여 강연이 열렸다. 영화의 일부를 보여주면서 진행된 강연에서, 올해 초에 일본에서 본 그의 전시 《망령들(Ghost in the Darkness)》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작년 12월 13일에서 올해 1월 29일까지 도쿄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전시는, 제목자체가 흥미로웠다. 개인적인 관심도 있지만, ‘망령’이라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존재는 일본에서 괴담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하는 존재이다. 괴담뿐만 아니라 유령이 찍혔다는 심령사진 역시 마찬가지로 일본사람들의 관심과 부합하는 부분이다. (덧붙이자면 당시 크리스찬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의 전시도 도코정원미술관에서 열렸는데, 제목이 《애니미터스 : 속삭이는 망령들(Animitas – Les âmes qui murmurent)》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망령이라는 존재는 그보다 오히려 광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전시에서 말하는 망령이란, 사진이나 영상자체가 갖는 특성이고, 한편에서 현대사회 속에서 작용되는 보이지 않는 힘, 즉 정치나 역사 뒤에 숨기는 힘을 가리킨다. 이 중에 후자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주장을 가지고 말하자면, 미메시스를 통해 추구되지 않는, 합리성에 죽음을 당한다. <트로피컬 매러디(Tropical Malady)>(2004)에서 호랑이의 화신으로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미메시스에 기반을 둔 신화라기보다는 신화-현실의 이항대립뿐만 남-녀와 인간-동물의 경계마저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정글이라는 배경뿐만 아니라 작품은 거기서 합리성이 지배하지 않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전시의 구성은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스틸 이미지, 기록영상(비디오 다이어리)도 같이 전시가 되는데, 관람객은 이 작업들을 보면서 영화 작업에서도 공통적으로 갖는 인상을 다시금 느낄 것이다. 그것은 필자가 보기에 망령의 무상함이다. 작품에 다루어지는 꿈과도 같은 줄거리(<나부아의 숲의 개와 우주선>(2008)), 순간적으로 튀는 불빛(<불꽃(아카이브)>(2014)), 사적이고 일상적인 장면(<잿더미>(2012), 도판)은 언제 망령이 될지 모르거나, 이미 망령으로 치부되어버린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망령의 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망령은 잊어버린 것, 혹은 사라진 것이 다시금 나타날 기회로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마들렌을 먹고 나서 옛날 기억이 떠올라온 것처럼, 어떤 한 사람을 특정하지 않고,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는 어떤 순간에 기억을 상기시킬 수도 있다. 그것은 작가가 선택하는 표현이자 동시에 보는 사람이 택하는 작품과의 소통방식이 아닐까.

<사진출처> 도쿄사진미술관 [https://topmuseum.jp/contents/exhibition/index-2572.html]

<참고자료>
Th. W. 아도르노, M.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역), 문학과지성사, 2001
도쿄사진미술관, 《망령들(Ghost in the Darkness)》 전시도록 및 리플렛 (2016)
도쿄현대미술관,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전시도록 (2010)
아트선제센터, 아티스트 토크: 아피찻퐁과 다크 유토피아 (2017.05.19.)
http://www.cinra.net/interview/201612-apichatpong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