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와 이미지, 그리고 예술

 컴퓨터의 발전 및 보급에 따라 예술의 영역에도 테크놀로지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전통적인 회화도 여전히 제작되기는 하지만, 컴퓨터를 이용하여 만든 이미지가 예술작품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컴퓨터는 원래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는—그야 말로 한 가족당 하나의 TV를 소유하는 것처럼—것은 아니었다. 소위 연구자나 발명가라 불리는 학자들에 의해 탄생된 컴퓨터는, 70년대에 일반용으로 보급되었을 때만 해도, 컴퓨터를 작동시키려면 계산이나 내주의 작동방식에 힘들게 애를 써야 했었다.

 그러다가 전환이 벌어진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컴퓨터가 그렇듯이, 이제는 화면상의 시뮬레이션을 가지고 사람들은 글을 쓰고 소프트웨어를 다룬다. 워드로 글을 쓴다는 것은, 키보드를 치면 화면상에 그렇게 한글이나 문자가 나오게끔 ‘보여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 시기와는 달리, 컴퓨터는 개방적인 태도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어른이나 어린아이, 그리고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컴퓨터를 사용할 때, 커서를 움직이고 클릭하는 모습은 똑같다. 우리는 모두 소프트웨어를 잘 다룰 줄 알고, 셰리 터클(Sherry Turkle)의 말을 빌리자면 컴퓨터는 더 이상 “분석하기보다는 협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에 따라 오늘날에는 컴퓨터와 관련이 있는 예술작품은 소프트웨어 위주로 다루어지는데 예를 들어 포토샵을 이용한 작업이 그렇다. (포토샵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트리밍, 색 조정, 균형 조정의 가공기술 자체는, 대중들에게 개방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다루느냐”의 문제 역시 개방적이다. 예술가들의 예를 들자면, 아스거 카르센(Asger Carlsen)의 작업(도판)이나 코바야시 켄타(Kobayashi Kenta), 그리고 백승우의 사진 작업이 그렇다. 이들의 작업은 때로 전통적인 콜라주 방식이나 추상화에 가깝지만, 컴퓨터를 소유하는 사람만이 그와 관련된 미술을 작업하지 않는 것처럼, 컴퓨터는 미술을 향해 디자인된 것이 아니며, 소프트웨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작업에 사용된 가공이나 ‘잘 다루지 못하는’—터클의 말을 빌리자면, ‘투명하지 못한’—기술은, 한국에서는 ‘짤방’, 일본에서는 ‘코라’(콜라주를 뜻하는데, 주로 웃음을 유발함)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광고의 편집처럼 사용가치를 생각하거나 못 나온 부분을 보정하려는 데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보다 창조적인 시도에 쓰이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과 그것이 아닌 것은, 니꼴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책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에서 강조하는 ‘사용’에 공통적으로 주목한다. 누구나 스마트 폰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보정을 하고 가공하는 시대에,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를 쓰건 자신이 찍은 사진을 편집하건 사람들은 사용자의 위치로서 전통적인 미메시스 개념을 거부한다. 더 나아가, 예술가와 일반 사람들의 구별은 기술의 보편화로 인해 그 경계가 사라지고 있고, 웹 사이트에 공개된 예술가의 작업은 갤러리 안에서 감상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마저도 무효화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예술가로서의 사용자(user)와 일반적인 사용자의 차이는, 공유자체에 목적을 두는지 아닌지의 차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아스거 카르센의 작업을 웃기려고 포스팅하지 않고, 그 스스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출처>
[http://www.asgercarlsen.com/8dufm0b9021hont4r0npwdliyzgb8w]

<참고자료>
셰리 터클, 『화면상의 삶 (Life on the Screen)』 (1995) (일본어 번역본)

美術手帖 2016.09, vol.68, NO.1042, #photograph
http://www.asgercarlsen.com/
http://koreaartistprize.org/project/%EB%B0%B1%EC%8A%B9%EC%9A%B0/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