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색깔 : 오오마키 신지 <Echoes – Genius Loci>

  하얗게 잊혀진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거기에 색깔의 비유를 너머, 어떤 부재의 뉘앙스를 떠올리게 된다. 폭설로 눈 덮인 마을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서도, 하얀 색은 어떤 존재의 없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색깔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하얀 색에 드러난 부재는 어떻게 보면 거기에 어떤 것이 존재했다는 지표(index)로도 볼 수 있다. 즉 하얗다는 것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물의 감춰진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색깔이 비유적으로 드러내거나 상징적으로 나타내는-예를 들어 백합꽃을 보고 고향의 연인 발밑에 피어오르는 그 추억, 그 추억을 통해 그 연인을 그리워하듯- 것이 없다고 해도, 하얗게 되어버린 과거는 잊혀진 것이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얀 색은 역설적으로 어떤 존재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단지 다가가기가 힘들 뿐-망각하거나 일치하지 않거나-이지, 그것은 완전한 부재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요코하마창조도시센터(YCC)에서 진행된 조각가 오오마키 신지(大巻伸嗣)의 새로운 작업은 기억과 관련이 깊은데, 그것은 처음에 시각적인 요소 즉 색깔을 보고 인식된다. 작품 <Echoes – Genius Loci>에서 관람객 시야에 확연히 들어오는 것은 하얀 색으로 된 바닥과 그 바닥부분과 구별되어 구성된, 마치 어떤 무대공간처럼 나누어진 빨간 양탄자가 깔린 공간이다. 관람객은 빨간 양탄자 위에 앉아, 수정(crystal) 가루로 된 하얀 바닥을 마주보게 된다. 유심히 바라보면, 하얀 부분에 가지각색의 꽃과 그 위에 발자취처럼 남겨진, 지도상의 요코하마의 모습이 보인다. 섬세한 그 표현은 수정이라는 광물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꽃도 지도도 둘 다 금방 바람에 날려버릴 듯 보인다. 에도시대에 개항하여 서구문물이 들어온 시기, 관동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시기,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이 세 가지가 이번 작품에 작가가 설정한 배경이다.

  빨간 양탄자 위에 앉아 보고 있으면 서서히 전시공간의 빛이 어두워져 가는 것을 알게 된다. 창문처럼  벽면에 설치된 거울에서 빨간 빛이 전시공간을 서서히 채워간다. 공간전체가 어두워져 빨간 빛이 만연하면서 거울에 붙여진 이미지가 점점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폭격과 지진의 피해를 상기시키는 이미지들은 빨간 빛에 둘러쌓여서 불안한 기억을 상기시키거나 혹은 전달해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옅은 색조에서 강력한 빨간 색으로 변하는데, 이러한 시간성은 금방 사라질 듯한 꽃과 도시의 모습과 교차한다. 하얀 색으로 된 바닥은 소멸과 탄생을 계속하는 자연과 도시를 형상으로 나타내주면서 동시에, 반복하는 과정에서 잊혀진 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방 안에 채워진 빨간 색을 보고 느끼는 화재나 전쟁의 이미지는, 하얘진 존재 -작품도 그렇고 우리 머릿속이나 거대한 역사에 잊혀진 것들까지- 를 다시 구해낸다.

 기억이 나를 엄습한다. 거울에 부착된 사진을 통해 얻는 시각정보는,찍힌 이미지 이상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휘젓는다. 그때 그 곳에 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심리 상태가 전달된다. 한낮의 평안함을 서서히 잠식해오듯, 빨간 빛으로 공간이 채워지면서 깊이 드리운 그림자가 기지개를 펴고 뒤따라온다. ‘나’라는 공간에 몰래 스며들어오는 기억은, 잊혀지거나 망각되어 하얘진 머릿속에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점점 크게 높여 도움을 요구한다.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내출혈보다 더 심한 압도감을 느낀다.

<참고자료>

전시회 리플렛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