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과 공간 문제 : 음악의 공간, 그리고 미술의 공간

  현대미술을 알려면, 최근에는 미술관에서 도슨트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처럼 어느 정도 지식에 대한 접근이 개방적이다. 반면에 현대음악을 알려면 현대미술을 아는 것보다 더 힘을 들여야만 한다. 물론 이렇게 예술의 두 범주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 도 있다. 각각에 요구되는 감각이 다르고 그에 따라 전달방식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시각에 호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각에 호소하는 것인데, 시간성을 동반하는 후자는 그만큼 감상에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또한, 예술작품의 수용에 대한 감각의 차이는 기록물이 갖는 특성의 차이도 된다.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는 이미지는 우리가 실제로 전시장에 가보질 않아도 <모나리자>의 붓질에서 리크릿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의 퍼포먼스까지 보여준다. 시각예술에서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찍히고 저장(다운로드)되는 반면에 음악은 기록에 시간을 할애해야 되고 다운로드 시간도 어느 정도 걸린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음악자체가 갖는 시간성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날에는 어느 정도 해결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인터넷 환경만 되면 우리는 유튜브(YouTube)나 사운드 클라우드(SoundCloud)를 통해 연주 시간이 긴 오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의 음악에서 맥스 리히터(Max Richter)의 작업까지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우라에 넘치는 콘서트 홀, 거기에 갇혀 있던 음악은 기록물로 등장하면서 오늘날까지 보다 많은 사람들의 귀를 열게 하였다. 레코드 음반에서 시작해 CD음반, 그리고 오늘날에 mp3 형태로 음악 자체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상당히 개방적인 것으로 발전되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시기에 해당되는 ‘한 곳에서 다 함께 공유’하는 방식에서, 기록물의 ‘소유’로 넘어오면서, 오늘날에는 ‘소유에 따른 공유’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현대음악은 신비의 베일에 둘러싸여 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동시대 작품이 전시공간에 보여지는 반면에, 우리는 페테르 외트뵈시(Peter Eötvös)나 토머스 아데스(Thomas Adès), 진은숙의 음악작품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장소에 부여된 성격 탓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현대음악의 범주에—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포함되는 작곡가는 콘서트 홀을 상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미술은 흔히 듣는 ‘화이트 갤러리’라는 말이 그렇듯이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20세기부터 시작해 다양한 작품이 설치되고 상연되며 기록되고 있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테리 라일리(Terry Riley)의 <In C>가 공연되지만, 세종문화회관의 콘서트 홀에서 브리짓 라일리(Bridget Riley)의 그림은 걸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공연장이 갖는 성격을 타파하는 시도를 보여주는 사례로 플럭서스와 연관이 깊은 예술가가 아닐까 싶다. 오노 요코(Yoko Ono)의 퍼포먼스 <Cut Piece>(1964)는 카네기 리사이틀 홀(Carnegie Recital Hall)에서 이루어졌고, (음악적의 성격이 어느 정도 있지만) 존 케이지(John Cage)는 <Living Room Music> (1940)에서 일상의 사물을 가지고, 20년이 흐른 1961년 일본의 소게츠 아트센터(草月アートセンター)에서 <0’00>작업을 보였다(사진). 이 작업에서 케이지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메모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의 대표적인 <4’33>(1952)와 비교를 할 때 이 작업은 퍼포먼스의 성격이 더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볼 때, 공연장이 갖는 성격을 타파한 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공연장의 범주인 연극 혹은 퍼포먼스의 ‘행위’라는 성격을 가지고 음악과 공연장의 전통적인 종속을 와해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부터 많은 예술가는—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언급한 내용에서 조금 더 나아가—하얀 공간에서 ‘거추장스러운 것’을 치우려고 시도를 해 왔다. 그런데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은 대중음악의 범주와 전통적인 음악의 이분법으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20세기에 작곡가는 다양한 범주를 넘어 작곡을 시도했다. 조지 거쉰(George Gershwin)은 재즈, 오스발도 골리호브(Osvaldo Golijov)의 민속적 리듬과 선율, 루치아노 베리오(Luciano Berio)가 시도한 이전 시기 음악의 차용과 편곡. 그러나 이토록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은 콘서트 홀이라는 공간을 넘어서지 못했다. 재즈 피아니스트, 클로드 볼링(Claude Bolling)이 플루트 연주의 대가, 장-피에르 랑팔(Jean-Pierre Rampal)과 협동적으로 연주하는 <Suite for Flute & Jazz Piano Trio>의 영상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장소에 따라 음악작품의 성향이 달라진다는 것은, 콘서트 홀을 벗어난 연주는 대중음악과 다름없다는 인식에 뿌리를 둔 듯하다. 음악에 기능이나 상업성이 연관되면 순하지 못하다고 하는 듯이 오늘날에도 현대음악은 폐쇄적이다. 이러한 폐쇄성—공간적으로도 인지의 차원에서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환경음악’의 사례를 들고 싶다. 말 그대로 환경음악은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음악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음악은 어떤 음악을 BGM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의 원래 목적이 그 BGM에 있는 것이다. 브라이언 이노(Brian Eno) <Ambient 1: Music for Airports>(1987)는 제목에 볼 수 있듯이 공항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목적으로 작곡된 음악이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공간에서 벗어나면서도 동시에 BGM로 전락한 클래식 음악의 수용을 거부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여전히 폐쇄적인 오늘날의 음악 공간은 어떻게 보면 자기충족적이다. 공연 무대에 금기시된 내용을 가지고 온 작가들이 앞서 본 오노 요코나 케이지였다면, 이노는 작곡에 있어 상정하는 장소를 아예 바꾸었다고 볼 수 있다.

<사진출처> [http://pitchfork.com/features/article/8941-john-cage/]
<참고자료/참고링크>
宮下誠, 20世紀音楽 : クラシックの運命, 光文社新書, 2014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08
http://tower.jp/article/series/2012/10/30/cage_shock
https://www.youtube.com/watch?v=aX96z7AuICs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