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 김인화 INHWA KIM

 

김인화의 빛과 공간

태양광이 선물한 몽환적인 이미지의 실내풍경

 

신항섭(미술평론가) 

빛과 색채는 아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빛이 존재함으로써 물상의 형태가 존재하듯이 빛이 있기에 색채가 보이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자연광, 즉 태양의 존재를 깨닫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색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순색을 마음껏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빛의 근원은 태양이다. 태양은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그 위치가 시시각각 달라진다. 동일한 물상일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색태가 달라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태양의 이동(실제로는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에 따른 빛의 강도 및 각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색깔도 다르게 보인다. 이렇듯이 인상파 화가들이 자연광의 신비를 깨닫는 순간 회화적인 신천지가 열린 것이다.

김인화의 최근 작업은 새삼 빛의 중요성을 일깨주고 있다. 빛이 회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까닭이다. 그에게 빛은 조형의 출발점이다. 빛을 그리는 화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빛의 존재성을 깊이 탐닉한다. 물상의 형태 및 색깔을 드러내는 존재로서의 빛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빛 그 자체를 주시한다. 태양광으로서의 빛, 즉 창을 통해 실내로 들어오는 빛의 이미지를 추적한다.그림2

이렇듯이 빛을 제재로 하는 그의 작업은 물상의 형태를 형용하는 일반적인 조형적인 시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강렬한 빛의 존재감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로부터 발생하는 공간적인 상황변화를 탐미적인 시각으로 응시한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빛이 중심적인 이미지로 자리한다. 물상의 형태는 빛의 효과에 따른 부수적인 이미지로 밀려난다. 빛으로 인해 일어나는 공간적인 상황은 조형적인 상상력을 부단히 자극한다. 따라서 빛에 대비되는 다양하고 풍부한 색채이미지는 그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하나일 따름이다.

빛은 사물의 형상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반대로 형태를 지우기도 한다. 빛 자체에는 형체나 색깔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빛이 간접광일 경우에는 형태를 드러내는 반면에 직접광의 경우에는 형태를 지운다. 다시 말해 태양광이 물체에 닿아 반사하는 부분은 형태가 사라지고 만다. 형태가 없으니 색깔도 보이지 않는다. 물상의 형태를 지움으로써 드러나는 빛의 존재감은 언제나 어둠의 상대적인 이미지로서 자리한다.

이와 같은 빛의 속성을 이해하는 지점으로부터 그의 작업이 발단한다.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빛은 하이라이트 현상과 같은 몽환적인 이미지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빛이 닿는 부분, 즉 반사광이 발생하는 하이라이트에 초점이 맞춰진다. 더불어 짙은 음영을 배경에 두고 직진하는 빛의 존재가 드러나는 상황을 포착한다. 이러한 상황은 실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른 아침 또는 늦은 오후 태양이 사선으로 비칠 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 대상이다.

실내에 들어오는 빛은 그 존재감이 강렬하다. 실내는 외부로부터의 빛과 소리를 차단하는 안정된 공간이다. 만일 창이 없으면 절대적인 침묵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밀폐된 공간이 된다. 이러한 실내공간에 조그만 구멍이나 창이 있다면 그로부터 들어오는 외부의 빛은 그 존재감은 한층 선명해진다. 더욱이 햇빛이 직진으로 들어오는 상황에는 빛의 존재감은 더욱 강렬해진다. 마치 레이저 빔이 쏘아대는 빛의 형태와 같이 직선적인 형태가 된다.

이에 비해 일반적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직진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산광을 수반한다. 창의 면적이 확장되는데 따른 광량의 증가는 주변부까지 밝게 만드는 까닭이다. 바꾸어 말해 창이 많은 일반적인 사무실에서는 직사광의 존재감은 약화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빛의 속성은 공간적인 상황, 실내공간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조형적인 변주를 보장한다.

그의 작업은 실내에 들어오는 빛의 이미지 및 공간적인 변화를 추적하는데 의미를 둔다. 창문과 벽 그리고 실내에 놓인 집기 따위에 비치는, 사선의 빛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상황변화를 주시한다. 실내풍경이라는 명칭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작업은 주로 화실 주변에 위치한 카페나 커피숍에서 소재를 얻는다. 여기에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추적한다.

강렬한 아침빛이나 오후의 빛은 때로 순간적으로 물상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광량의 변화가 크면 시지각은 민첩하게 반응하기 어렵다.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빛이 강렬하면 시각적인 변별력이 떨어져 순간적으로 물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빛의 이미지가 그의 작업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어쩌면 다양하고 풍부한 추상적인 색채이미지는 시각적인 변별력을 잃는 혼란스러운 순간에 대한 몽환적인 표현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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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실내작업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는 의자이다. 커피숍이나 카페에 놓인 평범한 의자들이 작업의 중심적인 이미지로 자리한다. 하지만 의자가 놓여 있는 위치, 즉 구도로 보아서는 의자가 작업의 중심적인 이미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실내 공간에 들어오는 빛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는 소재일 따름이다. 즉, 처음부터 의자를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빛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끼어드는 부수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작업에서는 실내에 놓인 집기에 대한 존재감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각을 견인하는 것은 역시 의자와 같은 집기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형태를 찾아가는데 익숙한 시지각은 실내에 놓인 의자를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 의자는 단순한 집기의 하나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신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누군가가 앉아 있던 빈 의자에 깃들이는 공허함은 그림의 내용에 관여한다. 불특정 사람들이 앉았다가 떠나곤 하는 의자를 통해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일테면 카페나 커피숍의 의자는 잠시 쉬었다 떠나는 간이역의 의자와 동질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작품의 구도는 철저하게 카메라의 눈을 따랐다. 다시 말해 스냅사진 형식을 그대로 빌려다 쓰는 형국이다. 빛의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니 물상의 존재는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싶다. 무엇보다도 의자가 놓여 있는 상황을 보면 이러한 심증이 더욱 분명해진다. 의자들은 화면상의 좌우 어느 쪽 구석이거나 또는 상단으로 크게 치우치기 일쑤이다. 이로써 작업의 중심적인 이미지가 실체로서의 의자가 아니라 빛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빛을 따라가다 보니 스냅형식의 구도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수평이나 수직을 의식하지 않은 분방함이 오히려 화면의 활력으로 작용한다. 물상의 존재방식과 관련해 수직과 수평을 기반으로 하는 중력의 법칙조차 개의치 않는 듯싶다. 그러기에 작품에 따라서는 수직과 수평의 원칙을 벗어나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움직이는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수평과 수직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마는 스냅사진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업은 에너지가 넘친다. 빛의 존재감이 워낙 강렬한 나머지 화면은 활기와 긴장감이 팽배하다. 에너지원으로서의 태양광이 만들어내는 기운은 역동적이다. 극렬한 빛과 음영의 대비로 인해 시각적인 긴장감이 화면을 장악하는 것이다. 눈부신 빛에 의해 더욱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다양한 색채이미지는 생동감을 야기한다.

어쩌면 그림에 활기가 넘치는 것은 빛과 음영의 강렬한 대비뿐만 아니라 즉흥성이 농후한 자연스러운 구도와 무관하지 않다. 작품에서 작가의 존재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은 스냅형식의 즉흥적인 시선과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계산적인 안정된 구도감각과는 다른, 직관적인 형태로 제시되는 구도가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에서 공간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조형적인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일반적으로 사실주의적인 공간감은 명암기법 및 원근법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처럼 공식화된 공간적인 표현은 경직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시지각을 혼란에 빠뜨릴 만큼 강렬한 태양광은 원근 및 명암에 의한 공간해석을 무색케 한다. 넘치는 광량으로 인해 과장된 듯싶은 빛의 존재감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화면은 소란스럽고 불안정한 상황으로 빠져든다. 비정상적인 상황처럼 보이는 것이다. 태양빛이 강렬하면 눈이 부시게 된다. 이는 정상적인 시지각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의 공간해석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데 있다.

일반적인 실내정경에서는 정적이고 평안한 구도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일반성에서 탈피하여 불빛에 이끌리는 불나비처럼 태양광이 만들어내는 눈부신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한다. 따라서 광량이 지나치게 많으면 물상의 색깔 또한 혼란 속에 빠져들게 된다. 색깔이 증발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비실제적인 색깔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실제색, 즉 눈에 보이는 색깔과 다른 과장된 이미지의 색채를 구사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태양광과 마주했을 때 눈이 부시면 시지각은 현실색에 대한 분별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 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혼란으로 인해 환상적인 색채감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롭고 풍부한 색채이미지는 이에 근거한다.

실내풍경이라는 제한된 제재를 통해 빛과 음영, 색채 그리고 공간적인 이미지를 아우르는 그의 미적 감수성은 일상적인 시각을 뛰어넘는 지점에 독특한 조형공간을 확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