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가구 프로젝트(도쿄, 롯본기)

오늘날에 예술작품이 놓이는 장소가 더 이상 전시공간에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미술관 밖에 설치된 작업이 모두 대지미술과 관련된다는 것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대지미술과 비교를 할 때, 오늘날 공공장소에서 볼 수 있는 작업은 자연의 소재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과감하게 땅을 파내거나 번개를 불러오게 하는 만큼 규모가 큰 작업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공공장소는 익명의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들 잠재성을 갖는다. 그만큼 어떤 작업은 시민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며, 어떤 작업은 만남의 장소나 도시를 상징하는 존재로 사랑 받는다. 크레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작업이 광화문역 근처에 설치된 지 한참 되었지만, 철거되지 않는 것을 보면 여태까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 혹은 부수려고 해도 비용이 든다는 경제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의 다른 작업이 그렇듯이, 그것이 아무리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부드러운’ 작품이라 할지라도, 일단 공공장소에 놓이게 되면 철거하는 데에는 비용이 어느 정도 들 것이다.)

 만남의 장소에서 시작해 그 지역을 상징하는 존재까지 되면서 예술작품과 시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대중이 그 작품을 보고 미적 판단을 철학적이거나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려 들지는 않는다. 아니쉬 카프어(Anish Kapoor)의 작업에 인도의 숨결을 찾지 않아도, 라이언 갠더(Ryan Gander)의 작업(예를 들어 <편집하면 비싸긴 해서 Because Editorial is Costly >)에 어떤 유희적 가치를 평가하지 않아도 그곳으로 오는 사람들과 예술작품의 거리는 가까이 할 수 있다.

 비평가인 양 거기에 있지 않아도, 대중들은 미술작품과의 거리를 멀리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공중 앞에서 예술작품이 반드시 공중전화나 공중화장실과 같은 기능성을 갖춘 시설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톱이 땅을 톱질하듯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것이 톱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호소하지 않는다. (올덴버그의 <톱질하는 톱 Saw, Sawing >) 그곳을 찾는 모두가 평론가다운 감식안을 갖지 않고서도, 그리고 그것이 기능을 갖춘 작업이 아닐지라도, 예술작품과 대중 간의 관계는 긴밀해졌다.

 이 두 가지 흐름이 공존하는 것이 롯본기의 ‘길거리 가구(Street Furniture)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은 오늘날에는 디자인이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말이 가리키는 범위가 매우 넓다. 왜냐하면 제작과 기능성이 함께 고려되면서, 사람들의 심리적인 부분이나 관계 역시 구축/재구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명칭은 가구로 되어 있지만, 모리빌 주변에 볼 수 있는 것들은 가지각색의 의자들이다.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의 방 안에서 도로를 바라보듯 구성된 공간(<정숙한 섬>, 사진), 비 내리는 날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토 토요오(伊東豊雄)의 벤치(<물결>), 제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의 단순미를 보여주는 벤치(<파크 벤치>) 외 10 개의 작업, 총 13명의 디자이너의 작업을 볼 수 있고 실제로 앉을 수 있다. 거실에 하나만 있어도 심미적인 가치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겠지만, 이 의자들이 도시 공간에 배치됨으로써 또 다른 심리적 효과를 제공해 준다. 즉 거기서는 의자와 사람간의 관계가 도시라는 맥락에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도시라는 공간은 바쁘고 피곤한 공간이다. 일에 지치고 대인관계를 힘들어 하며 사적인 생각조차 할 틈이 없는, 어떤 여유—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시간적인 것일 수도 있고, 둘 다의 경우가 허다하고—를 갖기가 힘들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콘(Francis Bacon)이 사람을 잠재적인 시체로 보고, 정육점에 가서 거기에 내 자신의 모습이 없는 것을 의아했었다면, 우리는 대량생산된 버스 정류장의 벤치에 앉으면, 그것과 내가 어떻게 다를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롯본기에서 사람들은 평소에 앉는 의자가 아닌, 보다 더 심미적으로 디자인된 의자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들이 주는 심미성과 기능성은, 디자인이라는 말이 보다 넓은 관계망을 포착하는 것을 말해준다. 즉 사람과 제품/작품 사이의 미시적 차원에서 도시와 사람들의 보다 넓은 관계까지 조명/재조명한다.

<사진출처> [http://at-art.jp/wp-content/uploads/160.jpg]

<참고자료>
데이비드 실베스터,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주은정 역, 디자인하우스, 2015 (p.157)
http://www.roppongihills.com/facilities/publicart_design/
http://www.roppongihills.com/facilities/publicart_design/pdf/artmap.pdf

editor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