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희 《스펙터클 속의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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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 내일은 너*

김 주 옥

*이 글은 2017년 3월 24일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10기 입주작가 공동워크숍을 위한 한윤희 작가 개인전 <<스펙터클 속의 허무>>에 대한 평론글이다.

 

대개 ‘청년실업’이라하면 30세 미만의 구직자가 일을 찾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학교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평소 생각한 것보다 더 크게 청년실업의 문제가 와 닿는다. 혹자는 청년실업을 ‘일자리는 많지만 힘든 일을 하기 싫어하는 청년들의 마인드’에 문제 삼으며 ‘우리 때는~’이라는 비교를 통해 비난 섞인 결론 없는 언쟁을 펼친다. 학교를 졸업한 후 20대의 성인이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얹혀사는 모습을 캥거루족 등으로 표현했었는데 부모가 자식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계속해주며 소위 ‘안정적’이라는, 부모 세대가 생각하는 직장을 얻기까지 돌봐주고 또 그들의 자식들이 언젠가 그 직장을 얻게 되면 부모의 임무가 끝나는 듯이 모두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교에서 미리부터 취업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구조적 모순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이 게으르거나 열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와 함께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을 지켜보는 10~15살이 많은 나의 모습에 그들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만약 그들을 캥거루족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면 적어도 내가 그들과 같은 모습이 아니어야 나름대로의 비난의 명분이 생기겠지만 10년의 세월을 그들처럼 고군분투 한 나는, 소위말해 고학력 비정규직의 나는, 과연 부모님 세대의 눈에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우리가 보통 지금까지 청년실업을 30대 미만의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을 지칭했다면 사실 이 청년실업의 문제는 대학원 진학 등으로 학교를 오래 다니고 졸업이 늦어지는 30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뜬금없이 청년실업의 문제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한윤희 작가의 회화 작품에서 2007년부터  보여지는 에스컬레이터가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한윤희는 이명박 대통령이 청년층에게 “눈높이를 낮추면 일자리는 많다”라고 말한 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눈높이를 높여라>라는 작품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제목은 이 시대가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사회적 억압의 반증이기도 하고 그에 대한 작가의 저항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눈높이를 높여도 딱히 방법은 없겠지만 어쨌든 눈높이를 낮춘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한윤희의 2012년 에스컬레이터 작품에서 보면 화면 밖에 존재하고 있는 시점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을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관찰자적인 시점이다. 이미 그 고지에 도착한 선발주자가 뒤따라오는 후발주자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그리고 그 후 2014년 작품에서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아래에서 지켜보는 시점이 존재한다. 에스컬레이터가 힘들이지 않고 계단을 오르고 내리게 하는 기계라면 그것을 타고 움직이지 않은 채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어떠한 이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힘들이지 않고 계단을 오르려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내려오는 힘 안 드는 동작까지도 쉽게 하려고 한다는 듯 비판적 시선이 깔려 있어 보인다.

 

하지만 2016년 한윤희의 신작에서는 이 모든 논리를 뒤 엎어버리는 반전이 등장한다. 폭이 10미터도 넘는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에 등장하는 에스컬레이터에는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기계의 풍경일 뿐 그 안에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작품을 보고 얼마 전에 어디선가 본 뉴스가 떠올랐다. 뉴스 기사에서 말하기를 조만간 자식세대의 청년실업과 함께 부모의 실업도 동시에 나타난다고 한다. 청년실업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면서 이제 부모도 회사에서 나오게 되어 실업자가 된다. 이제까지 부모님들이 상상하던 삶, 일자리를 얻게 되어 자식이 독립하면 한시름 놓는 것과 동시에 부모를 챙겨줄 것이라는 기대가 모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자식을 교육시키고 청년의 실업자 자식을 돌보느라 노후자금을 모으지 못한 60대 이상의 부모는 정년퇴직을 하고 100세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서 노년실업을 맞이한다.

 

한윤희의 작품에서 보이는 텅 빈 에스컬레이터의 주인공을 ‘그 누구도 아닌’ 하지만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무(無)’의 상태이자 ‘공(空)’의 상태로 표현하자면 그동안 우리가 바라보았던 에스컬레이터의 주인공들이 바로 대상화된 타자가 아닌 내안에 이미 존재했던 타자, 즉 ‘나’이기도 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한윤희의 2016년 작품 제목인 <스펙터클 속의 허무(nihil)>에서 말하는 그 ‘니힐’은 가능성으로의 존재, 텅 빈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브루스 나우만이 1968년에 <복도(Corridor)>라는 폐쇄회로 장치인 감시 카메라 퍼포먼스를 했을 때 길고 좁은 복도 끝에 모니터를 두고 그 모니터를 향해 앞으로 점점 걸어가는 사람이 보게 되는 화면속의 사람은 결국 나를 뒤에서 비추는 카메라에서 촬영된 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는 주인공을 내가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것처럼 한윤희의 에스컬레이터 연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시점이 멀어진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내가 그 화면밖에 존재하는 시점의 나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면 앞에서 말했던 청년실업의 주인공이, 결국 그 주인공을 어떤 대상으로 여겼던 나와 동일인물이 된다는 섬뜩한 반전을 느낄 수있다.

 

지난날 산보자(flâneur)가 바라보는 ‘파리’를 도시의 스펙터클이라고 했다면 또는 스펙터클의 사회를 현대 사회의 모습으로 정의했다면 한윤희가 말하는 ‘허무를 품고 있는 스펙터클’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차를 둔 세대들이 같은 시대를 사는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같은 사회의 한 부분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동상이몽(同床異夢)과 같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다른 꿈을 꾸고 있는 ‘타자’가 바로 ‘나’이기도 하다는 모습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눈을 낮추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작 눈을 낮추지 않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던 사람들도 해가지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대편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계단을 내려왔다. 내가 바라보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나는 누구에게 말 걸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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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김 주 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