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nism>>

김태은, 권순왕

사이아트 도큐멘트(CYART DOCUMENT)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63-1

 

사이아트 도큐멘트(CYART DOCUMENT)에서는 김태은, 권순왕 작가의 2인전 <<Phanism>>을 2017년 1월 7일(토) 부터 1월 15일(일)까지 개최한다.

이 전시는 두 명의 미디어 아티스트가 ‘판’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술행위와 결과물인 ‘물질’을 해석하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비교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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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版) 구조를 통해 본 인간과 물질 그리고 예술행위의 위치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김태은 작가와 권순왕 작가는 각각 회화와 판화를 전공하였다. 그러나 전시되는 작품들은 입체공간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설치 작업들이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재료나 기법 혹은 표현 방식에 의해 전공이나 작업의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어떤 전공을 하였는가에 의해 한 작가의 작업을 바라보는 경향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상업적 목적을 갖고 있는 미술시장의 경우 물질로서의 예술작품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이때 전공에 따른 재료나 표현 방식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작가의 행위와 그 결과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차원에서 보면 재료나 표현방식을 넘어 작가가 어떠한 시각적 지평을 가지고 있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고찰이 요청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판이즘(Phanism)을 제안하며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이 부분에 대한 흥미로운 사유의 단초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술행위의 본질에 대한 작가적 통찰 그 자체가 작업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판이즘(Phanism)을 먼저 제안한 것은 권순왕 작가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단순히 판화의 확장이라기 보다는 본디 예술행위라는 것이 판 개념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그는 정신적 차원에서의 의식의 판이 물질에 투사되어 이것이 고착된 형태로 된 것이 예술작품으로 정의 되어 왔다고 본다. 사실 인간은 외부세계의 시각정보를 망막이라는 2차원 방식으로 수용한다. 감각기관으로부터 수용된 자극은 이렇게 2차원을 기반으로 한 정보를 통해 뇌에 전달되기 때문에 뇌에 저장된 기억 역시 2차원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정보를 다시 회상해내는 방식도 2차원적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느끼는 3차원적 경험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각 시스템에서 이와 같은 2차원 정보를 토대로 3차원 공간을 정신적 차원에서 구성해 냄으로써 만들어낸 일종의 환영이자 착각일 뿐이다. 권순왕 작가의 작업을 보면 그는 이와 같은 인간 내면의 정신적 차원의 판과 외부의 물질적 차원의 판을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작업에서 양측의 판이 연결되는 과정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해낸다. 이러한 표현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의식의 판으로부터 예술작품과 같은 물질적 차원의 판으로 연장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권순왕 작가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하여 인간이 물질을 정신 안으로 끌어오기도 하고 혹은 정신을 물질 안에 담아내기도 하는 과정, 즉 정신과 물질이 연장되는 커뮤니케이션의 프로세스를 노출시킨다. 그는 송신자와 수신자로 지칭할 수 있는 양측 극단이 소통을 한다는 것은 한 장의 판이 여러 겹의 판으로 분할되고 연장되는 것과 같음을 보여준다. 발신자로부터 시작되어 여러 판의 매체로 확장된 정보라는 것은 수신자에게 도달된 매체로 연장된 정보이자 발신자와 수신자가 하나의 정보로 동기화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권순왕 작가는 판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하여 2차원과 3차원 사이, 그리고 공간 차원에서 물질과 정신의 사이의 연결과 매체적 연장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호적 위치를 확인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김태은 작가의 작업은 권순왕 작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판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게 된다. 김태은 작가의 작업은 우선 시간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업은 시간적으로 원형의 판으로부터 시간에 의해 변형되거나 소거된 판의 형상적 변화의 틈새 사이에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언덕 위의 발화점> 작업에는 동굴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석회질이 흘러내려 만들어지는 석순과 유사한 형태의 기둥과 그 위에 단순화된 사물의 형상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보이는 사물들은 마치 높은 온도에 의해 녹아버린 물체처럼 원형의 형상이 어떤 사물이었는지에 대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게 서로 이어져 있고 얽혀있다. 자세히 보면 원래 분명한 형상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 오랜 시간이 점점 이 형상을 지워낸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모습이다. 이와 같은 사물의 원형과 퇴행된 형상의 관계에 대해 작가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언어로 표현한 바 있다. 기억 속의 원형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변형되거나 망각 이르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그의 작업에는 수많은 시간에 따른 퇴행의 형상들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가 만들어낸 형상 속에는 그러한 변형의 과정이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 분, 초 단위로 형태를 담아내는 판이 있다면 수없이 많은 변형의 과정이 기록되어 담겨졌을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녹아 내리는 것 같은 형상 만들어내면서도 완전히 형체가 없어진 상태가 아닌, 일부분 형태가 남겨진 형상을 특별히 선택하여 보여주게 된 것은 아마도 원형의 형상과 완전히 소멸된 형상 사이에 수없이 많은 연결 지점들이 있음을 암시하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교하고 명료한 형태의 원형의 형상에 대한 기억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결국은 밋밋한 면의 단순화된 상태로 녹아내려 껍데기와 같은 형상만 남을 것이다. 기억 속에 명료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들은 시간의 판을 지나가면서 평평한 표면의 흘러내린 형상만 남아 망각의 결과만 남겨질 것이다. 작가는 시간의 에너지에 억눌리고 있는 과정이 그대로 보이는 중간적 형상, 즉 변형되고 소멸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형상을 드러냄으로써 매체의 소멸을, 이미지의 소멸을, 상징구조의 소멸을 그리고 결국에는 기억의 소멸을 예언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여 드러낸다. 권순왕 작가가 공간적 차원에서 정보의 발신으로부터 수신의 과정 전체를 분할 된 판에 의해 보여주었다면 김태은 작가는 시간적 차원에서 명료한 기억으로서의 원형의 정보가 이후 망각되어가고 손실된 정보로 진행되는 중간의 한 지점만을 보여주고 있다. 이 한 지점은 영화 필름의 한 컷이라고 간주하여 보게 된다면 이는 영화가 시작하고 끝나는 필름 전체에서 볼 때 극히 일부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변형되는 중간의 한 지점으로부터 형상의 일부분을 포착하여 시간적 흐름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질로부터 발생되는 형상에 대한 정보는 인간의 망막이라는 판 위에서 이미지 형식으로 변환됨으로써 정보로 저장되고 활용된다. 인간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간을 정보로 축적하고 다시 역방향으로 공간을 창출해내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 같은 인간의 시각 정보 수용방식에 연관시켜 판(版)이라는 개념으로부터 권순왕 작가와 김태은 작가의 작업을 읽어가다 보면 인간과 물질 사이의 매개 구조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이해에 이르게 됨을 느끼게 된다. 물질은 매개체로 존재할 수 있으나 의도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내거나 타인의 존재를 확인해내는 주체적 행위를 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과 물질적 존재 사이에서의 차별성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권순왕 작가와 김태은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일종의 통로나 매개자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신호를 발생시키는 최초 혹은 최종 말단 지점이자 신호의 발화 지점으로서의 작가의 존재적 위치를 확인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업을 통하여 단순히 매체적 상황을 가시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닌, 주체가 어떻게 타자와 동기화되는가에 대해, 그때 매체가 그 동기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가에 대해, 그리고 주체로부터 타자의 존재적 일치의 경험으로서 혹은 이를 확인하는 과정으로서의 예술행위의 위치에 대해 작가적 통찰의 지점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