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진  Sujin Kim

 

장식적 패턴과 ‘페마주’의 회화

-김수진의 최근 작품을 중심으로

서영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평론가)

소재

  김수진의 최근 작품들에는 눈으로 보아 식별 가능한 일상의 사물들이 등장한다. 대체로 화면 중앙에 위치한 이들 소재는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일상의 현장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현실의 실제 사물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림에서 이들 소재는 작가 개인의 일상생활을 표상하는 환유의 형상들로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 평범한 사물들의 기호를 통해, 감상자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하도록 이끈다. 물론 사물은 변형과 전위를 통해 실제 사물과 다르게 바뀌었기 때문에,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작품의 소재에 일어난 의미의 전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소재-사물이 작가의 내면에서 연상된 그 무엇의 기호이며, 그 무엇의 상징적 연쇄 관계로 만들어진 것 즉 환유의 형상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작품 소재에 관하여, 작가는 본인이 “좋아하거나 조형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그린다”고 말한다. 이 말은 꽤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2000년대 이후 젊은 작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된 네오-팝 아트의 경우와 달리, 김수진은 일상 사물을 대중문화의 단편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개인 감성과 욕구의 기호들로 전유(appropriation)한 것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는 사회학적 관심보다 개인의 주관과 지각, 내면적 인식 과정을 더 중시하는 편이다. 바깥을 내다보고 사회비평적 시각으로 작업하기보다도, 안쪽 즉 자기 내면을 바라보며 지각된 바를 표현하는 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작품에 드러난 사물들은 주로 꽃, 자동차, 자전거, 모자, 가방, 구두, 화장품용기 등으로, 여성적 이미지(feminine images/ femme images)의 소재들이다. 작가가 개인적 기호로 좋아한 것들의 수집 목록이며, 매스미디어나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친 것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사물들의 표현방식을 보면, 사물의 형태는 한결같이 독특하게도 화면 가운데에 고정된 채 매우 단순화되어 있다. 바탕 화면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사물의 형태는 마치 평평한 표면 위에 콜라주된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추상회화에서처럼 형상(figure)과 바탕 화면(ground) 사이에 뚜렷한 이원적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더욱이 원근과 명암의 부재로 인해, 사실주의나 자연주의 회화에서 보아오던 입체적 형태가 아니라 평평하게 양식화된 형상으로 다가온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소재들은 구체적 사물로 식별됨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실재감의 결여 때문에,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있는 이미지 혹은 과거 모더니즘 미술이 강조한 양식적 범주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형상 미술(The figural)의 부류로 지각이 된다. 더더군다나 움직임이 없는 이들 정지된 형상들은 그 부동성 덕분에 감상자의 시각과 촉각의 감각 경험을 심화, 증대시킨다. 또한 단순하게 변형된 형태는 작가의 양식화 경향을 부각시키면서, 작품에서 고찰해야 할 문제가 평면성, 단순성, 도식성, 장식성 등의 특성들임을 깨닫게 한다.

 

선과 패턴

  필자는 작가의 작품에서, 화면 중앙에 놓인 형상보다 배경의 장식적 패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매혹과 놀라운 경이를 불러일으킨 선들의 무한 반복과 그 결과인 기하학적 패턴의 증식, 이것은 작가의 최근 작품들을 시작하게 한 결정적 요인일 뿐 아니라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게 하는 실마리로도 여겨진다. 2013년부터 시도된 작가의 작품들 -작품마다 소재를 지시하는 단어가 제목으로 붙여져 있다- 은 그 소재가 무엇이 됐든지 간에 어느 한 점에서 시작된 선에서 출발하여, 배경의 빈 공간을 차츰 메우는 식으로 완성되어 나갔다. 선이 사선과 역사선 혹은 가로선과 세로선으로 연결되어 간단한 삼각형 혹은 사각형(평행 이등변 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도형의 유닛을 이루면, 그 패턴을 반복적으로 집적시킴으로서 화면 공간을 채워나간 것이다. 배경의 반복된 선들은 그 단조로움에도 불구하고, 감상자의 시선을 흡인하는 힘이 의외로 상당히 크다. 이 선들에 대한 작가의 언급을 참조하기로 한다: “배경의 선들은 처음에 별 생각 없이 끄적거린 의미 없는 낙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패턴처럼 보이는 이 선들은 그 기원이 공책 끄트머리에서 시작된 선들이다. 이 선들이 무한하게 반복됨으로서, 화면 공간 안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처럼 무한히 연결된 선들을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드러낸 선으로 규명한다면 어떨까? 작가는 오토마티즘(자동기술법)에 근거해서 선 긋기를 계속 반복해나갔음을 설명한 적이 있다. 마치 폴록이 드리핑 회화작품을 제작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뚜렷이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계속 드립을 했다고 말했던 것과 같다. 따라서 김수진 작가의 반복된 선 긋기도 단순한 리듬을 타면서 “별 생각 없이 끄적거린 의미 없는” 행위, 다시 말해 본인의 무심한 의식의 궤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한데 이것을 초현실주의자들이 주장한 ‘무의식’의 행위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반복적인 선 긋기가 자동기술에 최대한 근접한 듯한 순간에도 ‘의지’와 ‘우연’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의지’는 선들의 일정한 굵기와 두께 그리고 선들 사이의 일정한 간격 더 나아가 균일한 패턴들의 반복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연’은 선들이 기계적 엄밀성을 띠지 않고 무한한 변화와 차이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반복된 선 긋기는 이렇게 의지에 의한 의도적 통제와 무작위한 우연의 요소들이 결합된 상태를 형성한다.

  선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지며, 선 끝의 연결점에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꺾여서 또 다른 선들로 연속된다. 임의로 꺾이는 각도에 따라,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도형이 생긴다. 그리고 이 같은 기하학적 도형의 패턴이 무리 집합을 이루면, 거미줄처럼 증식되면서 화면 공간을 가득 메우게 된다. 물론 여기서 도형들은 어느 하나도 중첩됨이 없이 수평으로 배열되는 체계를 따르고 있고, 이로서 화면을 평면적으로 연결시키는 망(네트웍) 구조를 이룩한다. 그리드(격자) 구조는 아니지만, 기하학적 패턴들에 의한 불확정적 질서로 짜여진 구조이다. 여기서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도형들이 동일하지 않고 제각기 다른 까닭은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에 따라 자동으로 선을 긋기 때문이다. 손목의 반복 움직임에 따라 선이 계속 그어지면서, 화면은 비슷하지만 상이한 도형들로 가득 채워진 올오버의 평면이 된다. 그리하여 배경 화면에는 중심과 주변, 상하좌우의 구별이 없으며, 전면균질한 평면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위에 사물의 형상이 자리하기 때문에, 중심과 주변의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정형화된 도형의 패턴들 -언젠가는 다각형 또는 원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반복과 이미지의 증식이다. 거의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이미지가 확장되는 과정은 자연의 프랙털 구조에서 비슷한 형태가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자기 닮음과 순환성으로 급기야 전체를 가득 채우는 과정과 흡사하다. 특히 이러한 패턴의 반복은 심리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준다. “반복의 행위는 본인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한 작가 자신의 말처럼, 행위자의 익숙한 반복은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마음에 평정을 찾게 해준다. 그러므로 선들을 반복적으로 긋는 행위는 수고로운 제작 과정이면서 동시에 휴식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동양철학에서 말한 것 같은 무념무상의 상태로 진입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선을 그으면서 복잡한 사념들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를 찾는 것, 다시 말해 반복 행위를 통한 정신 집중으로 몰입의 즐거움을 획득하는 것은 제작자에게나 감상자에게 매우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심리효과라고 할 수 있다. 끝없는 반복에의 몰입은 의식과 행위의 일치를 가져오고, 자아와 세계의 일치라는 융합 감정은 무위의 행복감을 얻게 하는 것이다.

  몰입이론의 창지사인 칙센트미하이가 언급한 다음의 설명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몰입은 의식이 경험으로 꽉 차 있는 상태이다. 이때 각각의 경험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느끼는 것,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몰입 상태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독특한 심리적 특성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선 몰입 상태에서는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강렬한 주의 집중이 일어난다. 모든 주의력이 완전하게 진행 중인 작업에 투여되기 때문에, 작업 이외의 활동에 대한 인식은 반대로 현저하게 약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몰입의 집중은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업에 대한 흥미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만큼 몰입의 결과인 만족감은 배가된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몰입 상태에서는 행위와 인식의 융합이 일어난다. 현재 하고 있는 활동에 깊이 심취해서, 그 활동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관찰자적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아 의식도 사라져 흔히 이러한 상태를 ‘무아지경’ 또는 ‘몰아지경’이라고 부른다.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몰입 상태에서 자아는 완전히 기능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마치 폴록이나 김수진 작가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계속 반복 작업행위를 해나가는 그래서 몰아의 강렬한 집중 상태에 이르고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가득 채움

  김수진 작가의 작업에서 패턴의 반복 문제로 되돌아가 논의를 진행해보기로 하자. 색선들의 패턴에 의한 반복은 화면을 빈 여백이 없는 가득 채워진 공간으로 만든다. 배경 화면에만 시선을 집중한다면 현란한 색선들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면서, 심지어 캔버스 틀 밖으로도 패턴이 계속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을 얻게 된다. 패턴의 반복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동기는 대충 칠할 수 없다는 작가 자신의 강박적 심리에서 비롯됐다. “빈 틈 없이 칠해야 완벽한 느낌을 가질 수 있고, 만족감과 행복감을 가질 수 있다”고 한 작가의 말을 따른다면, 필자는 화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일이 완벽을 향한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던 ‘색칠하지 않은 빈 공간을 남겨두지 않으려던’ 습관과 꼼꼼하게 색칠하는 성격은 또한 여성적 속성이기도 하다. 바느질, 뜨개질, 레이스 짜기 등 전통적으로 여성이 맡아왔던 직조의 일들은 거의 모두가 반복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형태를 빈 틈 없이 꼼꼼하게 완성시켜 나가는 수공예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페마주’와 관련한 설명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여하튼 작가는 자신이 화면을 가득 채우거나 형태의 테두리를 완전히 두르는 습관과 그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충족된 만족감을 느끼는 태도에 대해 스스로 억압하거나 조절하고자 하는 바램을 피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순수 미술의 오랜 관례인 자연주의식 재현법이 요구한 것들, 다시 말해 선택적 묘사와 삭제 그리고 원근법적 공간 안에서의 선과 색의 강약 구분이나 명암에 의한 인위적인 입체감 표현을 굳이 따를 필요가 없음을 지적해두고 싶다. 화면 공간을 가득 채우고 형태에 테두리를 그음으로서 도출되는 결과는 화면의 평면화와 형태의 단순화 내지는 도식화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양식화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경향은 오히려 21세기 이후 더 강화되고 있는 속성이며, A. 리글의 양식사론 이후 E. 곰브리치의 ‘도식과 수정’ 이론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론가들로부터 주목받는 특성이다. 또한 회화의 평면화와 형태의 단순화에서 비롯된 장식성의 효과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가들 그 중에도 패턴 페인팅과 뉴이미지 페인팅 화가들 그리고 특히 페미니즘 미술가들이 늘 관심을 갖고 실험하고 있는 경향이기도 하다. 문제는 패턴의 반복과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일이 자신의 내면적 욕구와 강박적 충동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일임을 주목하면서, 이 여성적 이미지의 작업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며 그래서 이 같은 장식성을 어떻게 작품의 강력한 특징으로 두드러지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이론들

  패턴의 반복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작업에 관하여, 다소 철학적인 언급을 짧게 덧붙여두고자 한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주저인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에서 물질-공간과 의식(기억)-시간에 대한 이원론적 일원론을 설명한 적이 있다. 그 중 물질론부터 언급하면, 물질은 공간을 점유하는 것으로서, 물질의 본성은 연장하면서 공간을 점유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예술작품도 물질이다. 그러므로 회화작품의 체험은 공간 체험이며, 다시 회화 화면을 공간이라 말할 때, 화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즉 선과 색, 패턴 등도 물질이다. 공간을 채우고 점유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패턴의 반복으로 화면을 빈 틈 없이 메우는 작업도 공간을 채운다는 점에서 물질로 공간을 점유하는 일이라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의 물질과 공간 작업 안에 생각 즉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분명히 그의 작품은 심리적, 정서적 측면에서 제작자나 보는 감상자에게 점층적인 몰입으로 인한 의식의 흐름과 나아가 정신적 만족감(euphorie 행복감)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반복된 패턴의 물질에는 의식(정신)이 있다. 물질과 정신의 일원적 합일에 대해서는 데카르트가 일찍이 ‘Cogito ergo sum’이라고 말함으로서, 생각하는 사유 의식으로 물질인 몸이 공간에 존재한다는 존재 사실을 확인하는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몸이 없다면 사유도 없으므로, 따라서 의식과 물질은 하나이다. 예술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은 공간 체험 내지는 물질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김수진 작가의 경우, 반복된 패턴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 활동이자 동시에 생각과 의식을 만들어내는 물질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생각과 의식이 왕래하는 매개물인 셈이다. 그리고 가득 채워진 화면은 생각의 점증하는 충만 상태를 지시한다. 물질(패턴들), 채움, 신체는 회화작품의 환유적 요소들이며, 공간을 채우는 주체는 의식이다. 반복된 패턴은 시선을 이동시키면서, 의식의 흐름을 이끌고 의식의 연속과 연장을 위한 토대가 된다. 그런데 물질(패턴)은 공간을 수평적으로 채우면서 고정되어 있다. 이 부동의 정지 상태는 언뜻 연대기적 시간과 충돌하면서 의식의 흐름이란 시간성과는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들게도 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기억이란 의식이 흐름이며 시간의 지속을 통해 수직적으로 운동하는 속성을 지닌 점을 가리키면서도, 이 의식의 시간이 기계적으로 연속된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지속 즉 정신적 순간들로 이루어진 순간의 지속임을 주장했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은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사이의 위계적 구분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간 존재가 이 두 가지 즉 의식과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 양자의 밀접한 결합으로 규정되며,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마치 심신이론처럼, 작가의 신체 움직임과 정신(의식), 제작 과정과 작품의 물질적 실체를 추론하는데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베르그송의 기억론(의식론)에서 설명된 ‘습관 기억’과 ‘이미지 기억’은 김수진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겠다. 습관 기억은 신체가 자동으로 움직여지는 운동 기억으로 일컬어진다. 가령 패턴을 반복적으로 그려나갈 때, 작가의 손목은 거의 자동으로 운동하는데, 이것이 무의식이 아니라 습관 기억이란 의식작용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미지 기억은 직관 및 우연성과 연관된 의식으로서, 작품 제작과정에서 선, 색, 패턴, 공간, 채움 등을 지각하고 직관하며 구별하고 판단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이미지 기억 안에는 다시 지각과 식별이란 두 가지 행위의 층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지각은 느낌과 같은 단순한 신체 접촉 감각에 그치지 않고, 감각 자료를 뇌에서 인식하고 해석하는 식별 의식과 연결된 채 작용한다. 이처럼 지각과 식별이란 두 의식이 합치될 때, 비로소 이미지 기억은 완성된다. 훗날 곰브리치는 이 이미지 기억의 단계를 정신적 반응기제란 뜻의 ‘mental set’로 명명하고, 모든 작품들은 작가의 정신적 반응기제에 의한 도식화, 양식화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게 된다.

  필자는 김수진 작가의 작품론의 기초로서 곰브리치의 이론도 매우 유용할 것이라 생각하고 여기 몇 자 적어보기로 한다. 처음 도상해석학에서 출발했던 곰브리치는 예술심리학 연구를 통해 『예술과 환영』, 『질서의 감각』의 저서들을 기술했고, 이 책들 안에서 예술은 지각과 인식의 내면적 경험 즉 개인의 의식 경험 및 내적인 삶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이론의 바탕에는 지각심리학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지각 -> 정신적, 심리적 반응 mental set -> 인식을 통한 도식화 -> 이미지의 양식화(감각의 질서). 이렇게 간략히 기술하는 것이 무리라고 해도, 이 글에 허용된 분량을 고려해서 약술한다. 여하튼 곰브리치는 작품이 곧 내면 의식 및 정서, 감정의 흔적이며 이미지로 형상화된 결과물이라 본다. 그리고 그로부터 미술이 발원한 본래의 장소 곧 작가의 내면 심리나 문화적 원천들에로 거슬러 올라가, 작가나 감상자의 시지각에서의 생성적 층위와 양식의 심리적 근거들을 논한다. 이 덕분에 미술작품의 양식 문제에 대한 설명은 형식 중심의 미학적 고찰로 한정되던 오랜 관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양식이 … 여러 가지 경향이나 변화를 극히 예민하게 기록하는 하나의 심적 구조”라고 한 곰브리치의 말을 따른다면, 양식을 순수한 시각형식이라거나 어떤 사상, 문화적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또한 곰브리치는 미술작품의 양식화가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정신적 반응기제(mental set)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함으로서, 망막의 이미지와 마음속 이미지를 옮긴 작품 이미지 양자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눈으로 지각된 이미지가 정신적 반응에 의해 변형되고 양식화됨을 증명했다. 미술가의 심리적, 정신적 체험을 전달하는 이 양식화를 탐구하는 과제가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 연구의 해법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곰브리치가 내세운 ‘도식과 수정’의 이론도 잠깐 언급하면, 작품의 양식화를 결정짓는 내면의 정신적 반응기제는 지각에서 식별한 자료를 정신-의식의 도식으로 정리하면서 이미지의 양식화를 달성한다고 설명된다. mental set의 도식이 양식화의 원형이란 것이다. 개별 작가마다 자신의 내면적 도식이 있고, 여기서부터 작가는 자신의 양식화 과정을 출발하는데, 그런데 사회, 역사적 환경에 따라 도식의 변화가 강제될 수 있고, 대상을 지각하는 정신적 반응기제의 연속성이 무너져도 그 도식에 새로운 변화가 생길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미술운동, 미술가의 작품에서든 공통된 양식화가 두드러진다 하더라도, 미술의 원형적 도식은 일정 기간 동안 유용하고 구속력도 지니지만 사회, 역사적 조건의 변화 혹은 미술가의 예민한 감수성과 정신적 반응의 변화로 실정에 맞지 않게 되면 그 도식은 수정되고 양식화도 변화되게 된다. 이것은 김수진 작가의 작품에서도 양식화의 수정과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이론적 단편이 되리라 본다. 인식하고 느끼는 의식의 도식을 수정하고 새로운 양식화를 만들어 나가는 일은 한 작품에서 다음 다른 작품으로 건너갈 때에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마치 들뢰즈가 말했던 힘의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 … 의 과정처럼, 곰브리치의 ‘도식과 수정’론도 미술작품의 변화와 전개 과정 즉 지각-> 도식-> 미술의 양식화-> 수정-> 새로운 지각과 도식 … 의 흐름을 따라 변화되는 현상을 설명한다고 본다.

 

‘페마주’(Femmage)

  ‘페마주’의 회화를 논하기 전에, 먼저 김수진 작가의 작품이 갖는 특별한 속성들 몇 가지를 먼저 지적하도록 해야겠다. 앞에서 암시했다시피, 작가의 회화 연작에는 공통적으로 작품의 양식화를 강조하는 요소들인 형태의 단순성, 선과 패턴의 반복성, 화면의 평면성, 색과 패턴에 의한 장식성이 있다. 이들 특징은 고도의 예민한 감각과 치밀한 통제를 전제로 한 작업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현될 수가 있다. 색채 추상에 근접하는 작가의 놀랄 만큼 아름다운 작품들은 그처럼 우연과 의지의 통제를 교차 직조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더욱이 끊임없는 반복적 수작업은 절대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고 긴장과 변화의 조화로운 리듬을 타면서 진행된 것이다. 반복을 통한 차이들을 만들어내면서 생동감을 일으키고, 선과 색 그리고 패턴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미지와 화면의 균형감, 통일감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은 오랜 인류문화사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온갖 여성적 손솜씨의 수공예 작품을 연상시킨다.

  또한 작가의 작품에는 평면성이 뚜렷하다. 화면 공간에는 중앙의 주제-이미지를 제외하면 그림자도 없고 원근법도 없다. 형상과 바탕 사이에서 느껴지는 깊이감도 매우 얕다[이 점은 마이클 크랙-마틴의 색면 회화 작품들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더하여 선과 점의 증식은 이 같은 평면성을 더 부추기는 방식이 된다. 이제 작품의 마티에르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동안 남성중심의 미술사에서 회화의 화면은 대부분 잘 다듬어져서, 재현된 이미지의 표면은 늘 매끄러웠다. 시각중심의 미술이므로, 화가들이 거친 질감에 의한 촉각성, 신체, 몸, 여성을 연상시키는 촉각성을 배제해온 것이다. 근대와 현대에도 순수한 고급미술, 모더니즘 미술에서는 촉각을 억압하는 현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20세기 말부터 페미니즘 미술이 등장하면서, 시각중심의 미술에 저항하며 질감을 강조하는 촉각성의 미술들이 대거 출현하고 있다. 미리엄 샤피로의 ‘페마주’ 회화와 로버트 자카니치, 에드 모세스의 ‘패턴 페인팅’은 시각의 촉각화를 통해 미술작품의 신체적 감각-지각을 촉구한다 김수진 작가는 아크릴 물감에 겔 미디움을 섞어 스퀴징(쥐어 짜기)으로 선을 긋는다. 이 제작방식은 손목의 힘에 따라 선의 두께를 조절하게 되며, 결국 화면에서 약간씩 도드라진 부조식 돌출부를 만들어내게 된다. 선의 두께에 나타난 변화로 촉각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힘의 흔적들은 곧 라이프니츠가 말한 물질의 주름으로 여겨지며, 무의 공간에서 유의 의미를 제공하는 정신적 주름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여하튼 겔 미디움에 공기가 들어가서 혹은 스퀴징할 때 손목 힘의 차이로 의도하지 않게 선의 모양과 두께가 약간씩 달라지는 현상은 더할 나위 없이 수공예적이다. 공장에서 기계로 대량생산해낸 물건들의 반듯한 외형과 차가운 인위적 규격성과 달리, 촉각적 성질의 색선들은 그 패턴의 반복과 함께 우연한 차이들을 만들어냄으로서, 보다 따뜻한 휴머니즘적 성격과 여성적인 이미지를 강조해준다.  

  지금까지 다채로운 색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잘못이다. 그런데 실상 김수진 작가의 작품은 색의 배열과 조합에 매우 예민한 색채 중심의 회화이며, 다양한 색들로 짜여진 정연한 네트웍 질서의 회화이다. 더욱이 기하학적 도형의 패턴들이 반복되면서, 화면은 화려한 장식성의 여성적 이미지 즉 페마주(femme image-femmage)의 회화로 식별이 된다. 일반적으로 페마주의 회화는 미리엄 샤피로의 <여인의 집> 작품에서부터 시작됐던 것으로 확인되며, 이후 1980~1990년대에 널리 확산되면서 패턴 페인팅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샤피로의 ‘페마주’ 화화와 ‘패턴 페인팅’은 모두 공통적으로 장식성과 유희성을 갖추고 있다. 이 점은 김수진 작가의 작품들 안에서도 명확히 드러나는 특성들이다. 김수진 작가의 경우 장식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듯, 기하학적 도형의 패턴들을 오방색에 가까운 화려한 색선들로 반복하며, 패턴들 사이마다 점을 찍어놓기도 한다. 물론 그의 장식적 패턴은 화면의 양식화의 결과이기도 하며, 화면의 평면성을 초래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밝고 화려한 색채와 단순한 선들의 패턴으로 장식성을 부추겼던 선행 작가는 앙리 마티스이다. 마티스가 또한 미국 색면추상회화의 선구자임을 염두에 둔다면, 김수진 작가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평면성과 양식화 그리고 패턴의 장식성은 현대 미술사의 맥락 안에 정당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페마주’의 회화에서 반복은 대체로 인류문화사에서 인용되는 직조 즉 옷감을 만들기 위해 직각으로 실(날실과 씨실)을 교차하여 짜는 행위로 자주 비유되곤 한다. 오디세이아 서사시에서 트로이 전쟁을 위해 남편 오디세우스가 떠나자 혼자 남은 여인 페넬로페가 베틀로 피륙을 짰다가 푸는 작업을 반복한 이야기가 있다. 수없이 떴다 풀었다 다시 뜨는 베짜기의 이 반복 행위는 직조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인들이 강박적으로 공간을 채워나간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공간을 채우는 이 반복 작업은 여인이 너울로 얼굴을 가리거나 혹은 자신의 주제(남근)가 텅 비어 있음을 가리고 은폐하기 위한 강박적 행위라고도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쿠사마 야요이의 편집증적 강박의 반복과 증식의 행위에 적합할 뿐, 김수진의 작품에는 그다지 적합하다고 할 수 없겠다. 왜냐하면 김수진의 작품에는 넉넉한 무위의 유희성과 충족가능함에 대한 예기된 만족감, 행복감이 밝고 화려한 색채, 풍성한 화면의 패턴들로부터 비추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작가의 수작업은 늘 반복되는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의 원천으로 정의된다. “작업하는 것은 놀이처럼 재미있다. 생각이 복잡할 때, 뜨개질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듯이,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 생각을 풀고 마음을 비우면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는 작가의 말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작가의 <장미 시리즈>는 2013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연작이다. 무려 100 송이의 장미꽃을 그리는 작품들인데, 그 100 점의 회화작품들 중 단 한 점도 색의 조합이 중복된 것은 없으며, 선과 패턴도 제각각 상이하다. 그야말로 다양한 색채 형상(The figural)들의 연작으로서, 여성적 소재와 여성적 이미지의 반복 연작인 점에서 ‘페마주’의 회화로 주목되는 사례라고 여겨진다. 앞으로도 김수진 작가의 작품은 양식의 수정과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모색이 이루어질 것으로 여겨진다. 그 과정에서 색과 선, 패턴의 반복 뿐 아니라 매체의 변화도 예견되는 바이다. 이 모든 미래의 작업들에 대해서도 필자는 장식적 패턴이 주는 탈 모더니즘의 ‘페마주’ 방식의 장점들이 더 확대되고 그를 통한 작가의 표현력이 더욱 더 생생해지기를 기대해본다.

4————————————————————————

김수진  Sujin Kim

Email : 257888@naver.com 

 

학력

2015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회화전공 박사과정 수료

2012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졸업

2008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시각디자인과 졸업

 

개인전

2015

‘장식적 패턴과 ‘페마주’의 회화’,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 한국

 

단체전

2016

‘연말선물’展, 키스 갤러리, 서울, 한국

‘대한민국 청년작가 발언’展,  갤러리 아리수, 서울, 한국

‘한국현대회화의 트랜스액션’展, 국회 의원회관, 서울, 한국

2nd ‘HashTags’展, 갤러리 다온, 서울, 한국

‘서울국제공예·아트페어 (SICAF)’, SETEC, 서울, 한국

‘각양각색’展,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서울, 한국

‘부상청년’展, 국회 의원회관, 서울, 한국

‘YAP (Young Artist Power)’展, 갤러리 일호, 서울, 한국

​2015

‘마이애미 리버 아트페어’, James L. Knight International Center, 마이애미, 미국

‘HASHTAG’展, 갤러리 다온, 서울, 한국

​’써주세요’展, 일리아나 갤러리카페, 서울, 한국

‘네스카페 돌체구스토 스플레쉬 파티’, SJ.쿤스트할레, 서울, 한국

‘의정부 아트 페스티벌’, 의정부 예술의 전당, 의정부, 한국

‘be gether’, 아트스페이스 H 갤러리, 서울, 한국

‘오늘의 젊은 예술가’展, 가가 갤러리, 서울, 한국

‘SOAF’, COEX, 서울, 한국

2014

‘NOW&NEW’展, 최정아 갤러리, 서울, 한국

‘안녕하세요, 러시아?’展, 주 러시아 한국문화원, 모스크바, 러시아

‘제3회 무지개 작품전’, 상암 DMC 갤러리, 서울, 한국​

‘위대한 선물’展, 문암 미술관, 서울, 한국

‘YAP 창립전’, 충무아트홀 갤러리, 서울​, 한국

‘홍콩 컨템포러리 아트페어’, 엑셀시어 호텔, 홍콩

‘겨울 꿈’展, 경민현대미술관, 의정부, 한국

2013

‘제3회 JW중외 YOUNG ART AWARD 2013’, 홍익아트센터 內 갤러리 블루, 서울, 한국

‘무지개 그룹전’, 유디 갤러리, 서울, 한국

‘제2회 무지개 작품전’,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그린관, 서울, 한국

2012

‘마음의 소리’展, 청아 아트센터, 서울, 한국

2011

‘POWER ART’展, 공평 갤러리, 서울, 한국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석사학위청구전’, 홍익대학교 문헌관 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제1회 신진작가 Art Festival ‘꿈틀’展, 공평 갤러리, 서울, 한국

2010

’11th GPS’展, 홍익대학교 문헌관 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대한민국 현대여성 미술대전’, 단원미술관, 안산, 한국

2009

‘봄..꽃..향기’展, 동아미술관, 대구, 한국

‘Little Blue Chips 2009’, 수성아트피아 호반 갤러리, 대구, 한국

2008

‘대구 아트페어’, EXCO, 대구, 한국

‘Re-View Plus (Powerful Painting 08-Ⅲ)’, 신미 갤러리, 대구, 한국

‘아시아프’, 옛 서울역사, 서울, 한국

‘New Face Artist’展, 상 갤러리, 서울, 한국

‘Synesthetic Bridges : Finding Asia’, Hillel Gallery, Providence, 미국

‘원하는 것은 자연이다’展, 현대자동차 문화센터, 서울, 한국

‘피어나다’展 3부, 각 갤러리, 서울, 한국

2007

‘NEW ARRIVAL’展 (홍익대학교 회화과 제58회 졸업전시회), 홍익대학교 문헌관 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수상 

2013 제3회 JW중외 YOUNG ART AWARD 특선

2010 대한민국 현대여성미술대전 입선

 

소장

화인 치과, 이두하 내과, 학문 외과, 네슬레 코리아, AD MERIT, 상재 스틸, 호미 인터내셔널, 갤러리 다온, 공평 갤러리 등

 
the-bag-no-1-30-0x30-0cm-acrylic-and-gel-medium-on-canvas-2014

The bag No.1, 30.0×30.0cm, Acrylic and gel medium on canvas, 2014

the-car-no-6-90-9x65-1cm-acrylic-and-gel-medium-on-canvas-2014

The-car-No.6-90.9×65.1cm-Acrylic-and-gel-medium-on-canvas-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