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머무르다 – 8] 속도 속 모뉴먼트 : 모리 마리코 <톰나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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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enesse Art Site Naoshima [http://benesse-artsite.jp/art/tom-na-h-iu.html]

 

 

한 때 인터넷에는 장난 삼아 제작되었을 법한 재미있는 사진이 돌아다녔었는데 바로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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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77&aid=0002909697

사실 이 사진을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도시에 머무르다 8번째에서는 ‘테시마 산 속 연못에서의 체험’을 소개한다. Yuki Konno가 카가와를 방문하였을 때 사진 금지 구역에서 전시하는 작품을 보고 그 곳에 가기까지의 여정을 기록이 아닌 체험으로 담아 온 글을 통해 우리가 스마트폰에 의존했던 잃어버린 경험 감각들을 떠올려본다.

 

글 Yuki Konno

사람과 미술의 관계는 오늘날 거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술관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허락하고, 어떤 경우에 관람자는 앱으로 특수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언급한 예술작품이 가지는 아우라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다. 그와 반대로 올해 일본 카가와 현에서 열린 세토우치 국제예술제는 촬영이 금지된 구역이 여러 곳 있었다. 일본 도시뿐만 아니라 한국, 프랑스, 스웨덴 등 세계 각지에서 오는 관광객은 상당히 아쉬워하지 않았나 싶다. 필자 또한 그렇다. 현대미술 활동을 하는 저명한 작가의 작품이 여러 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이나 체험으로밖에 남기지 못했다.

그 중 하나가 모리 마리코(森万里子)의 <톰나플리, Tom Na H-lu II>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숲 속 못에 설치된 매우 다가가기 힘든 작업이다. 이 말은 못에 설치된 작품과 사람이 보는 위치가 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작품을 감상하려면 온라인 상에서 보는 도판으로는 불충분하다. 일본, 카가와 현의 작은 섬, 테시마의 산 속 연못이라는 한정된 위치에 있는 이 작품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관람자가 경험하는 작품과의 거리는, 편재하는 스마트폰 속 이미지와 다른, 하나의 과정을 포함한 경험이다. 그곳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숲 입구에서 장화로 갈아 신은 다음 산을 올라가야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예쁜 옷을 입고 어깨가방을 걸친 사람을 몇 번 보니까 왠지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여, 아웃도어 바람막이를 입고 배낭여행용 가방을 매고 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 온 버스가 다음 정류장으로 출발하는 소리가 숲 앞에서 와해된다. 대나무가 자란 숲 속을 걸으면서 느끼는 서늘함을 가을 햇살은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작품 앞에 도착하니까 연두색 물풀로 뒤덮인 못에 하얀 물체가 서 있다. 이 하얀 물체를 보는 순간, 기념비와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세종대왕 상이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의 동상이 사람이 다가가기 쉬운 곳에 놓였다면, 모리 마리코의 작품은 사람이 드문 곳에 있다. 군중 속에서 힘을 발휘한 조각상과 달리, 모리 마리코의 작업은 벤야민이 분석한 ‘제의가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가가기 어려운 위치에 존재하고 신비로운 존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SNS에서 전시 욕구를 드러내면서 살고 있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주장한 것처럼 속도는 경험 속에 과정을 소멸시켰다. 사진은 자신의 경험을 증명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존재를 실시간으로 ‘전시’하는 즉시적인 인덱스가 되었다. <톰나프리>가 설치된 테시마로 가는 배의 운항 수는 한 번 놓치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고 테시마로 가는 동안 파도가 매우 거셌다. 그때는 산을 올라가는 것 또한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은 이와 같은 예술작품의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다. 촬영금지를 알리는 간판 따위 신경을 쓰지 않듯이 옆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었다. (필자의 추측이지만) 그 사람은 사진을 공유할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라는 말과 해쉬태그로 은폐하면서 전시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혹은 사본이 원본의 아우라를 강화해준다고 알고 있어서 그렇게 사진을 찍는 것인가?)
 모리 마리코가 테시마에서 한 작업은, 한정성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작품의 아우라가 보는 사람에게 신비스러운 인상을 준다. 과정 속 체험으로서 나타나는 감상방식은, 오늘날 인터넷으로 공유되는 속도와 과정을 도외시한 결과에 대한 집착에 넘치는 사회에 제의적인 모뉴먼트로 등장한다.

<참고 자료>
김이순, 「한국의 근대 초상조각」, 『한국의 근현대미술』, 조형교육, 2007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 길, 1936/2007
심혜련, 『20세기의 매체철학 :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그린비, 2012
ポール・ヴィリリオ, 市田良彦訳, 速度と政治, 平凡社ライブラリー, 1977/2001